바란/역사

김현제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2월 25일 (토) 13:0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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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 연표 · 왕실 칙령 · 지역권
역사 · 종교 · 경제 · 사회 · 소수민족 · 군사 · 외교
바라리온 계획 · 2차 바라리온 계획 · 사상

개요

다음 문서는 바란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로, 부토니에 말기와 바란의 전체역사를 다루는 문서다.

기원

바란의 원론적인 기원은 바란 혁명이전에 존재하던 바라니에 왕가의 부토니에로부터 비롯된다. 부토니에의 많은 역사는 금서로 지정되어 지금은 열람할 수 없지만, 많은 전승에 따르면 부토니에는 헤멜바르트의 일원이 북상하여 토니에 강 인근에 나라를 세운 것이 그 역사라고 알려져 있다. 일찍이 그곳에서 악마와의 전쟁을 함께한 바라니에 일파는 마법이라는 힘에 인간이 종속된다고 여겨 새로운 나라에서는 마법을 알리지 않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법 또한 네번 도서관어딘가에 보관되고 있다. 이런 배경이 있는 까닭에 바란에서의 헤멜바르트에 대한 인식은 조상의 국가이자 근본 자체이고 악마로부터 세상을 구한 영웅국가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토니에 말기

  • 저물어가는 왕국의 시대

44세기[3]부토니에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왕실에서는 대내적으로 민생의 안정에 대해서 외면했고, 경기순환은 정체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서부와 북부의 이민족에 대한 침입 등 어수선한 시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도인 토니에의 황금성채에서는 화려한 향연이 펼쳐졌고 이를 보다못한 북부의 군벌들은 남부의 네번 가문과 밀회를 가진다. 그러나 네번은 국내의 상황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았고, 이를 보다못한 베니치의 지배자였던 메세츠 시베니움은 자신을 따르는 군벌들과 의견을 맞춰 반란을 준비한다. 그들은 왕가 내부에서 자신들을 찾을 조력자들을 물색했고, 그 중 페시란 바라니에와 의견이 합치되며 마침내 4305년 1월 군벌과 페시란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바란의 시작이었으며 훗날 이들은 혁명 영웅으로서 이름을 올리고, 바란 혁명은 성공하게 된다.

사실 부토니에의 왕정군은 이미 오랜 폐단과 비리로 엉망인 상태였고, 반면 미세자리아 부족과의 오랜 싸움으로 우수한 수준을 갖춘 북부 군벌에게는 비교도 되지 않을 싸움이었다. 그나마도 세스라인드 전선에서 버티며 전선이 소강됐을 뿐이었고, 그들의 예상대로 바란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엔 무리가 없었다. 다만 혁명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네번 가문의 정통성에 대한 인정이었는데, 의외로 네번과 남부는 북부의 새로운 국가를 인정하고 그 수하로 들어가면서 혈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나머지 지역들도 별 다른 문제없이 바란에 통일되었고 마침내 3년만에 오늘날의 바란 국경이 완성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4309년 세스라인드가 수도화되면서 바란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바란 왕국의 등장

  • 두 영웅의 나라

바란은 혁명 직후 헤멜바르트는 물론 저 멀리 자소크까지 그 정통성에 대해 인정을 요청했다. 국내적으로는 페시란 칙령을 통해서 이전의 사회 ·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쓴다. 그러나 바란은 결국 군벌에 의해 건국되었기 때문에 그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고, 특히 메세츠 시베니움페시란 바라니에의 양자 입장과 철학이 전혀 달랐기에 늘 의견이 상충했다. 지위가 있는 귀족이나 지역의 유지들은 바란의 왕의 뒤로 메세츠라는 실권이 있다고 보았고 그것이 어느정도 사실이었다. 심지어는 두 사람의 나이차이는 물론 둘이 스승과 제자라는 중요한 배경까지 있었기 때문에 페시란에게 메세츠는 뒷배이면서도 정적이고 경쟁자이면서도 우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의외로 금방 해결되었는데, 메세츠 시베니움부토니에 결사대의 테러로 죽게되며 페시란은 자신이 원하는 계획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것이 페시란 칙령이다. 페시란은 그의 죽음 이후 권력을 차츰 강화하고 약소군벌들을 숙청함과 동시에, 오직 강한 군벌들만 남겨두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페시란의 전략은 당장 바움베니치의 양대 군벌들을 남겨두되, 약한 군벌들은 제거함으로서 그들의 원한이 왕정이 아닌 그대로 권력을 흡수한 두 군벌에게 가도록 의도하였다. 실제로 북부 군벌들은 메세츠 시베니움을 지지하였고, 그의 죽음이후 자신들의 권세를 빼앗기면서 그것이 왕정의 문제보다는 왕정에게 휘둘린 그의 아들 세반도 시베니움이나 바움에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바움베니치 양 가문은 당장 지도자를 잃은 상황에서 와해되기 보다는 왕정과의 친선으로 힘을 유지하고자 했고, 이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왕정의 술수를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모양이 된다. 또한 그들은 더 먼 미래를 생각해서 페시란의 죽음 이후, 새로운 왕이 오를 때 그 형세를 뒤바꾸면 된다고 생각했다.

약해지는 왕권

  • 반페시아 왕정의 등장
  • 군벌들의 재정립

4376년 6월 병세가 나아지지 않은 왕 페시란 바라니에가 병환 중 쓰러지고, 중년의 반페시아 바라니에가 즉위했다. 그는 뛰어났던 아버지보다는 조금 모자랐으나 인성마저 그렇지는 않았고, 다소 평이했으며 악평도 없었다. 그러니 지도력이 없어서 대중 앞에 서거나 이끌지는 못했는데 그를 보좌하던 소지아 시베니움이 늘 그의 의중을 의회와 대중, 귀족가들에게 전했다. 그렇다보니 중요한 전달은 모두 그가 도맡았고, 어느새 반페시아의 목소리보다 소지아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게 된다. 이것은 소지아의 배후가 베니치 가문인 점도 있었고, 페시란 왕정 시기에 꺾인 군벌의 위세를 다시 높이려는 개인적인 야망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결국 군벌들은 차츰 성장하는 반면, 왕정에 대한 대중과 귀족들의 지지는 다시 꺾여갔다. 페시란 칙령 당시 선포된 공공기업들의 운영 실패와 부익부빈익빈의 경제 문제 등을 모두 왕정의 문제로 지목되고 있었다.

4360년대만 하더라도 새로운 국가중심 사업인 광산업과 철강 제련, 이에 관련한 수출이나 곡식 분배 등 바란의 경제상황은 양호했다. 그러나 제도적인 허점이 드러나고, 운영이 엉망이라는 점이 여실히 언론으로 보도된 데다가 네번이 지지를 보내는 만큼 보도 관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결국 바란은 군벌의 강화로 누구도 그들에게 함부로하지 못했다. 단 테반시온 바라니에[4]는 군벌에 큰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성인이 된 이후 십여년 간 해외에서 나갔다 돌아온 사이 군벌들의 상황을 알곤 큰 분노에 빠졌다. 그는 늘 군벌을 불신하면서 그들이 얼마든 배신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때문에 자소크 군사고문인 에반디 아짐과 어울리며 왕정군을 창설하고 강화하는데 힘썼다. 단 불행히도 이미 군벌 역시 바움베니치 전술작전부대를 강화하여 양쪽의 힘이 균형은 큰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미세자리아 연합 등장과 국경 분쟁

4200년대 당시, 미세자리아의 북부에서는 부족들을 연합하여 하나로 뭉치는 통일이 진행되었다. 이들의 세력은 점점 성장해 군벌들이 노예장사를 하던 남부 즉 세자리아 유역 까지 세력이 뻗친다. 바움의 군대는 이들과 대치했지만, 너무 많은 수가 나타나자 피해를 우려한 귀족가의 판단으로 이남까지 퇴각한다. 양국의 군대는 강 하나를 두고서 대치했는데, 곧 며칠 후 왕가에 이 상황이 전달된다. 이 사건이 4478년 미세자리아 국경분쟁이다. 단단히 화가 뻗친 바움베니치는 왕가에 당장 전쟁을 선포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는데, 테반시온 바라니에의 극구 요청과 당시 왕실에 바움, 베니치의 인사들이 부재한 틈을 타 이들의 요청을 거부한다. 그리고 테반시온은 단독으로 미세자리아 분쟁을 무마시킨다.

사트.svg 자세한 내용은 바란/쿠데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쿠데타, 그리고 군벌 몰락

진작에 테반시온과 자소크인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군벌들은 왕정을 뒤엎기로 결정하고, 과거의 경로대로 내전을 계획한다. 이것은 4480년 바란 쿠데타이다. 군벌은 단숨에 전쟁을 끝내고, 과거처럼 새로운 왕가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실패하고, 테반시온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강력한 전권을 가지게 된다. 혼란스러운 정국을 정리한 그는 군벌을 평정하고 그 재산을 몰수했으며 이를 통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진행을 계획한다. 표면적으로는 안정된 미래가 보장된듯 했다. 하지만...

바란-미세자리아 전쟁

  • 양국의 전쟁

자소크력 4481년, 짧게는 7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부토니에와 북부의 타세자리아 지방과 앙숙이던 미세자리아 연합이 전면적으로 바란을 침공한다. 바움-베니치가 쿠데타 당시 전력으로 국경수비대를 동원했던 탓에 그들이 세자리아 강을 도하하는 것을 미연에 막을 수 없었다. 그나마도 부유한 도시에 속하던 북부는 역사상 유례없는 약탈을 당하고, 그 군대는 진격을 멈추지 않고 쿠데타로 무너진 수도권 북부까지 도달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쿠데타 당시에는 패배한 전투가 많았을 뿐 군대가 쉽게 와해되어서 인력은 남아있었고, 테반시온은 자신의 휘하 사단들을 집결시키고 1년 전의 경험을 살려 다시 방어전을 실행한다. 열병기를 사용하지 않는 미세자리아 연합은 잘 조직된 바란의 군대와 맞서기엔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쿠데타 시기와는 다르게 대대적인 군단으로 적들을 포위하는 전술을 이용한다.

에반디 아짐은 테반시온에게 방어전을 지속하되, 후방의 군대는 토니에 강을 기점으로 방어전선을 만들자는 작전을 계획한다. 미세자리아의 연합 군대는 바란의 군대가 물러서면서 세스라인드를 제외한 그 주변의 대부분의 영토를 점거하고 편안하게 포위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1년 내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 보았고, 전령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계획에 불과했고, 테반시온의 친위대는 그들의 배후를 쳐 보급경로를 차단하고 강 줄기를 따라 도본에서 대치하고 있는 병력들을 역으로 습격했다. 강 너머와 전방의 숲에서 양방으로 습격하자 미세자리아 군대는 힘을 사용하지 못했고, 길게 늘어진 군대는 차례차례 격파당하다 으로 도망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테반시온의 실책이기도 했는데, 큰 피해를 당하자 바로 항복한 쿠데타 군벌에 비해서, 역사적인 원한으로 찾아온 타국의 군대는 전혀 항복할 기색이 없었다. 전술로 그들을 모아내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여전히 어마어마한 수의 군대가 남아있었고 이들은 고스란히 지역에 퍼져서 통제없이 전국을 약탈하는 산적으로 변모한다. 이런 모습에 당황한 에반디 아짐은 전쟁을 끝내는 방법이 이들 모두를 전멸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여길 정도였다. 결국 기나기고 지루한 전쟁이 시작되었고, 무려 4년의 기간동안 이 구석구석 숨은 미세자리아 패잔병들과의 2차전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자 테반시온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지도자의 덕목이나 법치가 아니라, 가장 최소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이라고 생각토록 만드는 배경이 된다.

평화의 시대

  • 종전

자소크력 4492년, 종전으로부터 7년 후 반페시아 왕이 서거한다. 이후 관례대로 테반시온이 즉위하게 된다. 그는 경제 문제, 내전,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국가의 핵심 영토들을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네번 직할령은 전쟁 당시 왕도의 참된 모습을 보고 존경스러웠다며 왕정을 따를 것을 천명했고 그나마도 헤멜바르트자소크의 도움으로 국토를 지속적으로 회복해나갔다.

대외확장정책

테반시온은 늘 자국이 강해지기를 바라는 염원이 있었다. 그의 정책은 대부분 실리적이고 실용적이었지만, 군사적인 부분 만큼은 필요 이상의 확장을 많이 바라기도 했다. 특히 왕정 사령부의 설치와 미래적인[5] 군제개혁은 그 기반 중 하나였고, 이러한 동적인 변혁은 바란의 대외확장정책을 촉진시켰다. 바란은 주변국들 중에서도 약한 소국들에 대해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었고 그 까닭에 징집법은 강력해졌다. 대중에게는 타국을 점령하고 지배하는 것이 자국강병의 길이라며 대중의 참여를 강조했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이러한 테반시온의 정책에 문제가 많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주노데 왕국을 상대로 자소크력 4508년 선전포고를 통해 바란-주노데 전쟁을, 북부에서는 바란-미세자리아 2차 분쟁을, 바다 건너에서는 민크 농본주의 공동체에 대한 정당성 확보 등 전방위적으로 공격적인 확장을 이어나갔다.

헤멜바르트의 인사이자 바란의 헤멜바르트 외교공사관인 메기 파파즈 략카(Megi Fafaaz Ryahca)는 이런 바란의 동향에 대해 근래 바란의 행동이 역동적이나 이것이 마냥 옳다고는 볼 수 없으며 과한 야욕은 반드시 화를 부를 것 ─라고 발언한 바 있다. 또한 바란의 신문사인 토니에 일보 역시 지혜로운 독재자와 평범한 선인 중 무엇이 나은가?─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띄운 적도 있다. 그러나 결국 4517년 1월에 바라리온 계획이 승인되었고, 많은 세스라인드 의원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군대증강은 시작되었다. 4518년에는 바란-민크 분쟁의 연장선인 바란-민크 전쟁이 개전했다. 결국 이러한 계획들이 총체적으로 연결되어 바란의 대대적인 확장 계획이 실현되고 있었다.

바란 군부의 입김

엑시온 왕가

아트리아로 향하다

바란은 주노데 왕국의 붕괴 이후, 이제는 주변부가 아니라 아예 대륙으로 뻗어나가길 원했다. 하지만 후무후니아와 같은 대국과 싸워 피해를 감내할 목적은 없었고, 대신 칼로이디아를 통해서 바란 정보부 인력들을 아트리아의 대륙으로 퍼트릴 계획을 세웠다. 소국이었던 칼로이디아는 바란 주변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목격하면서 전쟁에 대한 의지가 꺾였고, 바란이 원하는 대로 국토 내에 바란시민을 위한 영토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합의보았다. 바란 역시도 바란령 주노데에 대한 통제와 주변부의 해적들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므로 구태여 칼로이디아와 싸울 의지가 없었고, 양국은 원만한 합의를 통해 바란은 새로운 대륙을 향한 통로를 열었다.

대대적 개혁, 바란 연방

  1. 2024년 11월 5일 08시 28분 21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3. 자소크력4300년 대
  4. 테반시온은 반페시아의 유일한 아들로서 늦둥이였다
  5. 바란의 기준에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