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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앙둔 제국]]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시작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주장이 난립하는데, 대체로는 [[아르토이트 징벌전쟁]] 패전을 꼽는다. 학자에 따라서는 그보다 뒤에 있었던 [[신산구 농단 사건]]이나 [[공포의 새천년]]을 말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앙둔 제국]]이 육상으로 진출한 것 자체가 망국의 징조였다 보기도 한다. 다만 그 어떤 학자를 불문하고, [[남극해 전쟁]] 패전이 결정적인 이유라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 사실 [[앙둔 제국]]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시작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주장이 난립하는데, 대체로는 [[아르토이트 징벌전쟁]] 패전을 꼽는다. 학자에 따라서는 그보다 뒤에 있었던 [[신산구 농단 사건]]이나 [[공포의 새천년]]을 말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앙둔 제국]]이 육상으로 진출한 것 자체가 망국의 징조였다 보기도 한다. 다만 그 어떤 학자를 불문하고, [[남극해 전쟁]] 패전이 결정적인 이유라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 ||
어찌되었건, [[앙둔 제국]]의 국민들은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현실을 깨닫고 정부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앙둔 제국]]에 살면서 속시원하게 불만을 토로할 방법이라곤 존재하지 않았으며, 들끓는 마음을 억지로 눌러가며 알맞는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 |||
* '''육상 진출의 여파''': 자국의 기술력에 자부심을 가졌던 [[갑인]]들은 [[자소크 철학단]], [[한카 교회국]], [[아르토이트 제국]] 등을 통해 신기술을 접함으로써 한 차례 기세가 꺾이고야 말았다. 또한 문화적 차이가 너무나도 컸던 탓에 [[앙두니으 기피르|앙둔산 제품]]들은 소비자층을 공략하는데 실패하였으며, 이는 곧 기업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만학단 운동]] 이전까지 대부분의 국민은 국가가 배정해주는대로 마치 일개 부품처럼 살아야 했으므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보람이 없자 원망의 화살이 정부에게 향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 '''육상 진출의 여파''': 자국의 기술력에 자부심을 가졌던 [[갑인]]들은 [[자소크 철학단]], [[한카 교회국]], [[아르토이트 제국]] 등을 통해 신기술을 접함으로써 한 차례 기세가 꺾이고야 말았다. 또한 문화적 차이가 너무나도 컸던 탓에 [[앙두니으 기피르|앙둔산 제품]]들은 소비자층을 공략하는데 실패하였으며, 이는 곧 기업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만학단 운동]] 이전까지 대부분의 국민은 국가가 배정해주는대로 마치 일개 부품처럼 살아야 했으므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보람이 없자 원망의 화살이 정부에게 향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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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극해 전쟁]]''': [[공포의 새천년]]에 이어서 또다시 [[흉내이리]]에게 데어버린 전쟁이다. 먼 과거 [[아르토이트 징벌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수교국을 도우고자 덜컥 참전을 결정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군인 천시 풍조 때문에 당대의 [[앙둔 제국군]]은 질도 사기도 형편없었으며, 결국에는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고 국제적인 위상도 포기해야만 했다. 전후 배상 탓에 벌어진 [[기피다네리르]]의 연달은 운영권 인계 혹은 폐쇄로 [[갑인]] 실업자가 속출했으나, 정부는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 * '''[[남극해 전쟁]]''': [[공포의 새천년]]에 이어서 또다시 [[흉내이리]]에게 데어버린 전쟁이다. 먼 과거 [[아르토이트 징벌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수교국을 도우고자 덜컥 참전을 결정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군인 천시 풍조 때문에 당대의 [[앙둔 제국군]]은 질도 사기도 형편없었으며, 결국에는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고 국제적인 위상도 포기해야만 했다. 전후 배상 탓에 벌어진 [[기피다네리르]]의 연달은 운영권 인계 혹은 폐쇄로 [[갑인]] 실업자가 속출했으나, 정부는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 ||
=== | === 혁명의 불씨 === | ||
[[갑인]]들은 [[남극해 전쟁]]까지 모두 겪은 후에 현실을 뒤돌아 보았다. [[기피다네리르]] 8곳 중에서, 멀쩡히 [[앙둔 제국]]의 자치령으로 기능하는 건 고작 3곳에 불과했다. | [[갑인]]들은 [[남극해 전쟁]]까지 모두 겪은 후에 현실을 뒤돌아 보았다. [[기피다네리르]] 8곳 중에서, 여태껏 멀쩡히 [[앙둔 제국]]의 자치령으로 기능하는 건 고작 3곳에 불과했다. 애초에 설립 때부터 [[이렘나]]에 운영권을 일임했던 [[주북산단]]을 제외하더라도 그러했다는 것인데, 이는 분명한 정책 실패였다. | ||
해결책을 강구하던 [[갑인]]들은, 체제 변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앙둔 제국]]의 체제는 더이상 민생에 아무런 이득을 주지 못했다. 신세대를 중심으로, 반정부·반자본·반종교의 3반정신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 정점에 선 [[용황]]이라는 존재는 변혁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었다. | |||
[[1차 팔라디 내전]] | 한편 [[남메디아]]에서 발발한 [[1차 팔라디 내전]]으로 [[아나키스트 코뮌 연방]]이 득세하자, 이에 감응한 혁명가들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주남산단]]은 아나키스트 평의회, [[주배산단]]은 에스라스타 임시사회주의위원회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 반란을 모의하였다. | ||
== 전개 == | == 전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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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반란을 보고받은 [[앙둔 제국]] 정부는 산단경비대에게 반군 소탕을 명령하였으나 오히려 산단경비대 병력 상당수가 반군에 가담했다는 암울한 사실만이 밝혀지는 등 긍정적 소득을 전혀 얻지 못했다. 혼란 가운데 반군은 각 산단 전역을 완전 점령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각각 아나키스트 평의회와 에스라스타 임시사회주의위원회의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자처하였다. 이에 [[앙둔 제국]] 정부는 반란 책동의 배후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지목, 군사 대응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 뒤늦게 반란을 보고받은 [[앙둔 제국]] 정부는 산단경비대에게 반군 소탕을 명령하였으나 오히려 산단경비대 병력 상당수가 반군에 가담했다는 암울한 사실만이 밝혀지는 등 긍정적 소득을 전혀 얻지 못했다. 혼란 가운데 반군은 각 산단 전역을 완전 점령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각각 아나키스트 평의회와 에스라스타 임시사회주의위원회의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자처하였다. 이에 [[앙둔 제국]] 정부는 반란 책동의 배후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지목, 군사 대응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 ||
=== 무력충돌 === | |||
=== [[AR 그룹]]의 지지 === | |||
== 이후 == | == 이후 == |
2023년 7월 15일 (토) 09:53 판
+ ![]() Agdun Exuro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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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지리와 행정구역 | 문화 | ||
경제 | 정치와 군사 | 외교 |
개요
자소크력 5276년 1월 10일 주남산단과 주배산단의 무장반란에서 촉발된 혁명으로, 3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앙둔 제국을 무참히 무너뜨린 역사적인 사건이다.
발단
앙둔의 쇠퇴
사실 앙둔 제국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시작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주장이 난립하는데, 대체로는 아르토이트 징벌전쟁 패전을 꼽는다. 학자에 따라서는 그보다 뒤에 있었던 신산구 농단 사건이나 공포의 새천년을 말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앙둔 제국이 육상으로 진출한 것 자체가 망국의 징조였다 보기도 한다. 다만 그 어떤 학자를 불문하고, 남극해 전쟁 패전이 결정적인 이유라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어찌되었건, 앙둔 제국의 국민들은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현실을 깨닫고 정부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앙둔 제국에 살면서 속시원하게 불만을 토로할 방법이라곤 존재하지 않았으며, 들끓는 마음을 억지로 눌러가며 알맞는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 육상 진출의 여파: 자국의 기술력에 자부심을 가졌던 갑인들은 자소크 철학단, 한카 교회국, 아르토이트 제국 등을 통해 신기술을 접함으로써 한 차례 기세가 꺾이고야 말았다. 또한 문화적 차이가 너무나도 컸던 탓에 앙둔산 제품들은 소비자층을 공략하는데 실패하였으며, 이는 곧 기업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만학단 운동 이전까지 대부분의 국민은 국가가 배정해주는대로 마치 일개 부품처럼 살아야 했으므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보람이 없자 원망의 화살이 정부에게 향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해룡의 둥지: 육상 진출 후 잠시 동안은, 사트 어딘가에 있을 해룡의 둥지를 찾아내기만 하면 다시 부흥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자들이 넘쳐났다. 탐색 끝에 수많은 후보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기적을 불러올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앙둔 제국 사회가 점차 국제화됨에 따라 선진 교육을 받은 국민들이 많아졌으며, 이들은 해룡의 둥지라는 개념 자체가 결국엔 국정 실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잘 짜맞춘 황가의 선전물이었음을 깨닫고야 말았다.
- 아르토이트 징벌전쟁: 미세자리아 연합을 도우려 호기롭게 참전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갑인의 자랑스러운 마장병기 껴제모걀이 세운 공이 마땅찮았던데다 종전도 자못 찜찜하게 이루어지자 관련 종사자들은 허무함을 토설하였다. 거기다, 기껏 완공한 미세자리아로가 순식간에 십자로로 개칭되고 전후 배상을 위한 교통로로 쓰이게 되자 패배감은 더욱 커졌다.
- 신산구 농단 사건: 갑인의 정서 상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용황의 권위에 감히 도전한, 역모급의 대사건이었다. 해당 사건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는 사실부터가 용황의 체면을 심히 구기는 일이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신속히 대처하지 못한 까닭에 온나라가 혼란으로 뒤흔들렸다. 민간에서는 점점 황가와 정부의 무능함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 공포의 새천년: 아무리 새벽이었다지만 흉내이리의 급습에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격납고와 정박지 등 주요 군사시설에 대한 공격을 그대로 허용한 데 대하여 국민들의 불안감이 날로 커졌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국군은 차라리 없으니만 못하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군인을 천시하는 그릇된 풍조가 일기도 했다.
- 만학단 운동: 그간 쌓여왔던 무수한 불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음으로써 유의미한 변혁을 이끌어낸 최초의 사례였다. 앙둔 제국의 갑인이자 MMZNS 유저였던 "찰칵찰칵"이 만든 가상 국가 "데시 사학단"은 오히려 혁명을 꺼려하는 보수적인 국가로 설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앙둔 제국의 신세대 독자들에게 혁명에 필요한 영감과 용기를 주었다.
- 남극해 전쟁: 공포의 새천년에 이어서 또다시 흉내이리에게 데어버린 전쟁이다. 먼 과거 아르토이트 징벌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수교국을 도우고자 덜컥 참전을 결정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군인 천시 풍조 때문에 당대의 앙둔 제국군은 질도 사기도 형편없었으며, 결국에는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고 국제적인 위상도 포기해야만 했다. 전후 배상 탓에 벌어진 기피다네리르의 연달은 운영권 인계 혹은 폐쇄로 갑인 실업자가 속출했으나, 정부는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혁명의 불씨
갑인들은 남극해 전쟁까지 모두 겪은 후에 현실을 뒤돌아 보았다. 기피다네리르 8곳 중에서, 여태껏 멀쩡히 앙둔 제국의 자치령으로 기능하는 건 고작 3곳에 불과했다. 애초에 설립 때부터 이렘나에 운영권을 일임했던 주북산단을 제외하더라도 그러했다는 것인데, 이는 분명한 정책 실패였다.
해결책을 강구하던 갑인들은, 체제 변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앙둔 제국의 체제는 더이상 민생에 아무런 이득을 주지 못했다. 신세대를 중심으로, 반정부·반자본·반종교의 3반정신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 정점에 선 용황이라는 존재는 변혁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었다.
한편 남메디아에서 발발한 1차 팔라디 내전으로 아나키스트 코뮌 연방이 득세하자, 이에 감응한 혁명가들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주남산단은 아나키스트 평의회, 주배산단은 에스라스타 임시사회주의위원회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 반란을 모의하였다.
전개
산단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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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크력 5276년 1월 10일, 앙둔 제국의 육상 영토인 주남메디아 산업단지와 주펠레마 산업단지에서 연쇄적인 무장반란이 발생하였다. 반군은 새벽을 기하여 사보타주를 감행하였으며, 각 산업단지의 행정을 총괄하던 중앙관리실을 비롯 주요 기반시설을 성공적으로 파괴했다.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이유로는 지휘체계의 마비, 즉 대부분의 주요 고위관리직 인사가 곧바로 탈출을 시도하여 제때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뒤늦게 반란을 보고받은 앙둔 제국 정부는 산단경비대에게 반군 소탕을 명령하였으나 오히려 산단경비대 병력 상당수가 반군에 가담했다는 암울한 사실만이 밝혀지는 등 긍정적 소득을 전혀 얻지 못했다. 혼란 가운데 반군은 각 산단 전역을 완전 점령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각각 아나키스트 평의회와 에스라스타 임시사회주의위원회의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자처하였다. 이에 앙둔 제국 정부는 반란 책동의 배후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지목, 군사 대응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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