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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역사
년도 |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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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 | HVE | ||||||||||||
992 | ILA | ||||||||||||
3257 | HPR | ||||||||||||
3295 | AKR | - | |||||||||||
4163 | BTN | ||||||||||||
4292 | MSS | ||||||||||||
4305 | BRN | ||||||||||||
4605 | LIP | ||||||||||||
4641 | MSR | VNC | VAM | VRD | NRD | VUS | NZH | ||||||
4661 | VVC | ||||||||||||
4665 | ART | ||||||||||||
4670 | ART | ||||||||||||
4796 | ART | ||||||||||||
4919 | SNK | ||||||||||||
현재 | 5758년 2월 8일[1] |
베니치 대공국 및 바움베니치 연합왕국 시기
아르토이트 제국의 근원은 바란 연방의 멸망 이후, 독립한 국가인 베니치 대공국에 있다. 베니치 대공국은 국경의 서쪽에 인접해 있던 바움 기사단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본래 바란에서 하나의 행정구역이었기에 서로 동질성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베니치인들과 바움인들은 본래의 바움베니치로 회귀하고자 하였고, 이는 바움 기사단국의 기사단장과 베니치 대공국의 대공이 결혼동맹을 함으로써 실현됐다. 결혼동맹 직후에는 스스로 왕조를 개창하며 바움베니치 연합왕국을 자칭했지만, 정통성 측면에서 문제를 겪게 된다.
아르토이트 왕국 시기
이들은 남메디아의 옛 역사를 되짚으며, 바란 이전의 대제국 부토니에의 후예를 자칭하게 된다. 부토니에는 바움베니치어로 "Teut" 혹은 "Teutland"로 기록되었다. 바움베니치 왕실은 바움베니치어로 '새로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어 'ar-'를 붙여, "아르토이트(Arteut)"를 새로운 국가 정체성으로 정립했다.
그러던 중, 4665년에 미세자리아 연합에 의해 끊임없이 지속된 국경 분쟁으로 지쳐가던 남미세자리아 부족공화국이 바움베니치에 자발적인 복속을 요청했으며, 바움베니치 왕실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국호를 “Arteutiches Rheik”, 즉 ‘아르토이트 국민국가’로 바꾸었다. 여기서에 정의되는 Arteut는 기존 토이트인(바움베니치계)와 미세자리아인을 모두 통칭하는 것으로, 남메디아에 존재하는 인간 문명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르토이트 왕국은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군사력 증강에 힘을 쓴다. 토이트의 후계국을 자처한 이상 남동쪽의 두 라인드 왕국들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기존 바움베니치 근위대에서 전해지는 군사 전통을 이어가는 것 또한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기술, 즉 과학과 마법·저주 연구는 군사기술을 우선으로 하여 연구되었다. 이 시점에 아르토이트특유의 마법과 공학기술이 결합된 마법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탄생한 대표적인 마법공학 기술력의 결과물로는 마도탄환이 있는데, 이 마도탄환은 아르토이트의 군사력 증강에 크게 기여했다. 단순히 화기의 저지력만이 높아진 것이 아니라, 마법을 이용해 속성을 각인하여 상황에 맞춘 탄환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규모 회전, 시가전, 저격전을 비롯한 다수의 전장에서 아르토이트 국가방위군(Rheikswehr)은 항상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또한 아르토이트의 기술 대부분을 차지한 마법공학 기술을 이용하는데 필수적인 광물인 ‘니토 크리스탈’ 또한 아르토이트 전 국토에서 풍부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아르토이트는 후대의 사가들에 의해 ‘제1 전간기’라고 불리는 25년 정도의 시간 동안 과학기술과 생활수준, 국민의식과 군사력 모두 전반적으로 급격한 발전을 겪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1 전간기는 ‘제1 황금기’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르토이트 재수복 전쟁
아르토이트는 가장 먼저 동쪽의 영토를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구 바란 지역은 내전 이후로 한 순간이라도 조용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국경 안정화와 국민 생활 안정화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으며, 세스라인드 제철소를 비롯한 산업시설과 더 많은 니토 크리스탈의 확보를 위한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또한 토이트의 후계국을 자처함에서 온 국가 정체성과 정당성이라는 정치적인 이유에도 필요한 일이었다.
두 라인드 왕국들이 서로 라인드의 정당한 후계라도 으르렁거리며 두 라인드 전쟁을 이어오고 있었을 때, 아르토이트는 제1 황금기 동안 바움베니치 근위대의 군사전통을 기반으로 국가방위군을 세계에서 손꼽힐 수준으로 강하게 키웠다.
4690년, 아르토이트 왕국은 두 라인드 왕국들에 나란히 선전포고를 하며 마침내 바란 지역의 명운을 건 전쟁인 아르토이트 재수복 전쟁을 개전했다. 서라인드 왕국과 동라인드 왕국은 바란 멸망 이후 계속해서 크고 작은 분쟁을 이어가는 상태였고, 도저히 서로의 국경 그 이상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라인드 왕국과 아르토이트 왕국 간의 국경은 거의 비어있었다.
아르토이트 국가방위군은 자동차에 주포와 장갑을 덧댄 형태의 신무기 “판처”를 이용한 기동전술로 서라인드 왕국의 국토 1/3을 6주도 되지 않는 시간만에 확보했고, 개전 이후 딱 6주가 되는 날에 수도를 함락하였다. 서라인드의 국왕은 결국 남은 국토 전부를 동라인드에게 넘겼으며, 이후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동라인드의 국왕은 라인드의 요새들을 이용하여 지연전을 이끌었다. 라인드 연합군은 마을 하나하나를 요새처럼 만들어 아르토이트에게 시가전을 강요했다.
아르토이트는 무리를 한다면 강제로 밀고 지나갈 수야 있었지만, 전력차이가 너무 극명하고 군인들의 인명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군수뇌부는 국왕의 동의를 받고 라인드 초토화 작전을 진행했다. 아르토이트 국방군은 야포를 이용해 마을 하나하나, 도시 하나하나를 파괴하며 천천히 진격했다. 이 작전에는 마도탄환의 파생인 마도포환이 이용됐으며, 이후 아르토이트 군사학교에서 화력우세 교리를 설명할 때에 대표적인 예시로 자리잡았다.
아르토이트 국방군은 4693년에 동라인드의 수도를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으며, 항복을 하루 미룰 때마다 동라인드의 도시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고 덧붙였다. 동라인드의 국왕은 이에 격분하며 항복을 거부했으나, 정말로 아르토이트가 동라인드의 제2 도시를 모조리 파괴하자 크게 크게 절망하며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르토이트 왕국은 4693년에 두 라인드 왕국의 영토를 합병했고, 4695년에 전 국토에 대한 통제력을 얻었다. 이후 다음 5년 동안 행정구역을 재정비하고 파괴된 도시에 산업중심도시, 과학중심도시, 상업중심도시, 교육중심도시 등의 새로운 계획도시를 지었다.
제국 천명
마침내 4700년 1월 1일에 아르토이트 국왕은 옛 토이트의 영광을 되찾았음을 선언하고, 아르토이트 제국의 탄생을 천명했다. 아이진-노이부르크 왕실은 아이진-아르토이트로 개명하며 황실로 격상되었다.
또한 남쪽의 옛 바란 연방 구성국이었던 네즈니베와 부세 공국에 복속 요구를 했고, 이 두 국가는 두 라인드 왕국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파괴 되었는지, 아르토이트의 국민 생활수준이 어떤지를 고려해서 자발적인 복속을 청했다. 부세 공국의 영토는 그대로 합병되었다. 네즈니베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는데, 이는 아르토이트가 네즈니베를 헤멜바르트 제국과의 완충지대로 삼길 원했기 때문이다. 네즈니베는 북부의 일부 영토가 아르토이트에 편입되었고, 아르토이트의 조공국이자 보호국이 되었다.
도보게
각주
- ↑ 1.0 1.1 2024년 11월 5일 08시 37분 53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