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언제적 이야기인지 기억이 안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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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바움베니치 연합왕국은 바움 기사단국과 베니치 대공국의 혼인동맹 체결부터 아르토이트 왕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띄기 전까지의 과도기를 뜻한다. 그렇기에 국호인 바움베니치 연합왕국(Ainiches Kronikerreich von Waum-Wenitz) 또한 과도기적인 임시 명칭이다.
역사
바움 기사단국과 베니치 대공국은 민족 구성이 거의 동일하고 상호 간 교류가 많아 각국 내부에서 상호에 대해서 굉장히 우호적인 풍조가 조성되었다. 자소크력 4637년 탄생한 베니치 대공국의 초대 대공과 4643년 탄생한 바움 기사단국의 초대 기사단장은 본래부터 막역한 관계였다. 베니치 대공은 슬하에 아들 한 명을, 바움 기사단장은 딸 한 명을 두었는데, 이 둘은 어린 나이 때부터 자주 만나며 감정 교류가 잦았다고 한다. 4657년, 베니치 초대 대공의 사후, 대공의 아들 빈첸트는 새로운 베니치의 대공이 되었다. 바움의 기사단장은 친우를 잃은 것을 슬퍼하며 감정이 국정 운영에 영향을 끼칠까 4658년에 그의 딸 사라에게 기사단장의 자리를 양위했다.
사라 기사단장은 바움의 미래가 작은 약소국에 지나지 않는다면 다시 라인드에 의해 지배당할 것을 예상했다. 사라 기사단장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한 달 동안의 국정 논의를 통해서 베니치와 영구적인 동맹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검토하였고, 이어서 자소크력 4660년 4월 18일, 빈첸트 대공에게 청혼을 하였다. 이 두 사람은 이전부터 서로를 연모하는 기류가 있었으니, 온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만 나온 판단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사학자들은 추측한다.
그 이전부터 바움과 베니치의 국민들은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지녔었고, 혼인동맹이 체결된 이후에는 아예 두 나라를 합쳐 연합된 체제로 나아가는 것을 원하는 여론이 강했다. 4660년 7월 1일에 빈첸트 대공은 바움과 베니치에 국민투표를 진행했고, 전체 국민의 83%가 찬성한다는 통계를 얻었다. 빈첸트 대공과 사라 기사단장은 바움과 베니치를 하나의 나라로 연합을 추진했다. 대공의 철저하지만 섬세한 일처리는 두 국가의 합병 시기를 크게 줄였다고 평가된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적당한 때만을 기다릴 때, 빈첸트 대공과 사라 기사단장은 4661년 2월 11일에 빈첸트와 사라의 성을 합친 아이진-노이부르크 왕조를 개창하고 바움베니치 연합왕국 (Ainiches Kronikerreich von Waum-Wenitz)의 탄생을 선포했다. 이 시기는 서라인드 왕국와 동라인드 왕국 사이에서 전운이 도는 때였기 때문에, 두 라인드 왕국은 바움과 베니치의 라인드 중심 질서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바움과 베니치 연합왕국 체제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두 라인드 왕국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찰이 심해지고 있고, 이 불똥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던 빈첸트 폰 아이진-노이부크는 바움베니치를 넘어서는, 보다 거대한 국가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고심했다.
도보게
각주
- ↑ 2024년 11월 5일 06시 55분 19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