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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시대 중간기 시대는 룩시아르와 에페이로스의 분립으로 인한 일련의 시기를 이르는 것이다. 고대시대의 니케르 문화 이후, 시트레나 강에 정착한 일련의 민족들은 서로 작은 고을을 이루며 살았고, 그 분포는 북쪽으로, 중앙으로, 더 아래로 간 사람들이 생겼다. 초기의 그 수는 얼마 되어보이지 않는다. | |||
중간기에 확인되는 문명권은 페투치아와 레조넌스 일부 지방뿐이다. 실제로 큰 문명의 융성하였던 곳은 페투치아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나 시트레나 강을 중심으로 분산된 도시국가들, 그리고 주도권을 잡은 두개에서 세개의 세력이 대립한 역사가 주된 역사의 부분을 차지하는데, 현재 페투치아인의 조상격인 에페이로스인, 그리고 레조넌스의 조상격 되는 룩시아르인이다. 피니투라인의 경우엔 역사가 다소 독립적인 경향이 발생했는데, 즈베스타이아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다만, 룩시아르와 에페이로스의 세력균형이 파괴되어 혼란시대 중기로 넘어갈때에 역사의 흐름은 합쳐지게 된다. | |||
즈베스타이아의 후예로서, 현재의 타카시아가 즈베스타이아의 위치와 가장 가까울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강 유역에서 물러난 이후 해안으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제로소의 전신으로 추정된다. 그당시 명칭으로는 메디아 해를 당시엔 "아키아(Αρχία)" 라고 불렀으므로 아키아의 도시라 하여 "아키스타이아(Αρχίσταια)" 라고 불렀다. 물론 아키스타이아와 제로소의 위치가 완전히 같은것은 아니며, 모종의 이유로 물속에 잠긴 이후 그 잔재 위에 세워진것이 제로소이다. | |||
여기서, 즈베스타이아(Ζυεβεσταια)라는 명칭은 세살르디아(Σεσαλδια)와 대비되는데, 세살르디아는 역사속에서 발견되는 확실한 문명이자 고고학적 증거가 존재하는 그 시대의 가장 큰 도시로서, 즈베스타이아와의 전쟁으로 에페이로스와 룩시아르의 분리가 일어난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날개가 있는자와 없는자의 구분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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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4일 (금) 02:1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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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투라-페투치아-레조넌스 제국 𝐓𝐚𝐢𝐧𝐚𝐭𝐢𝐨 𝐝𝐢𝐞 𝐏𝐢𝐧𝐢𝐭𝐮𝐫𝐚-𝐏𝐞𝐭𝐮𝐜𝐢𝐚-𝐑𝐞𝐳𝐨𝐧𝐲𝐧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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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페레 제국의 역사는 시띵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는 셀렌드리얼 전례력에선 그 날을 0년으로 계산하는 만큼, 시띵교의 역사가 그대로 제국의 역사로 비추어지는 경향이 크다. 실제로 시띵 이전 시대는 혼란시대 라고 한다. 시띵 이후의 시대는 문명시대 이라고 한다. 혼란시대는 시띵 이전에 혼란밖에 없었다는 경구에서 비롯되었고, 문명시대는 시띵의 가르침으로 지금이 비롯되었다 하여 문명시대라고 한다.
혼란시대는 최근 세부적 분류가 있었는데, 전 혼란시대, 후 혼란시대로 나누어서 전 혼란시대때는 완전히 야생의 세상을, 후 혼란시대때는 지역 곳곳에 난립된 도시국가들간의 내용을 다룬다. 이후 문명시대땐 제1제국, 제2제국, 그리고 현재의 제3제국으로 나누어 시대를 구별한다.
개관
혼란시대
시띵이 오기 이전을 혼란시대(피페레어:Πολοσλρια μαγισρα)라 하며, 혼란시대라 부르는 이유는 시띵 이전에 혼란밖에 없었다.라는 경구에서 비롯되었다. 혼란시대는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되며 전기는 니케르 천에 정착하고 초기 문명을 이루는 시기, 중기는 문명의 중심이 시트리나 강으로 이동하며 도시국가들간의 문명사회를 이루게 되는데, 이때를 황금기라고도 하며, 가장 무역과 상업, 그리고 지식의 전파와 발전이 활발하였던 때이다. 후기는 문명사회가 흉작으로 도시국가들이 식량을 구할 수 없게되자 중앙화된 권력없이 다원화된 권력의 분포로 인해 위기에 집단으로 대처할 수 없었고, 그렇게 법과 질서가 무너지며 혼란한 시대가 오는데 이때가 혼란시대의 후기이다.
혼란시대는 특별하게도 각 시기마다 전해지는 중요한 문서들이 존재한다. 혼란시대 전기는 『원초연대기』, 혼란시대 중기는 『히페소스의 일기』, 『나할리아 영웅담』, 『프리디아 역사서』 등이 전해진다. 각각 그 당시 시대의 생활사, 당시 시대의 영웅적인 면모로서 이상형을 나타내고, 역사서는 당시에 있던 일을 전하는 대표적인 3개의 서적이 있다. 혼란시대의 막바지인 후기에 들어서면 2개의 책이 대표적인데, 『페르켄시스의 시집』, 『소라티아인의 편지집』 이 대표적이다. 각각 당시 혼란하고 질서가 무너져 흉악한 세상이 되버린 사회를 비관하며 염세주의적으로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의 시집이고, 편지집은 당시 생활사와 정치사 등 종합적인 내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편지집이다. 대부분의 편지가 소라티아에서 발송되었던 것들이라서 소라티아인의 편지집이라 불린다.
혼란시대의 특징은 문명의 발전사가 정착기인 니케르 문명 이후에는 중앙화되고 강력한 누군가가 이끄는 체제가 아니라 다원화된 권력들이 서로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체제가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니케르 천에서 시트리나 강으로 이동한 문명의 중심은 누군가가 서로 독점하기에는 너무 서로가 고만고만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레조넌스인들은 이때부터 자기중심적인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이때부터 날개가 없는 이들을 "ⲔⲐⰔⰗⲨⰞⰋⰞ", 날개없는 자라 부르며 날개가 있는것을 당연시 여기는 문화가 나타난것으로 보인다. 레조넌스인은 니케르 문화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분파된것으로 추측된다.
니케르 문화는 시트레나 강의 지류인 헤네르 강의 하천인 니케르천(川)에서 발생하였으며 원초연대기가 쓰여진 곳이자, 로스니아 문자를 최초로 발명한 지역이기도 하다. 다만 이때는 지금과 같이 많은 음소는 없었고, 초기 8개 문자인 Ⲁ(알카), Ⰱ(비티), Ⲯ(케카), Ϫ(델셀론), ⲉ(이프), Ⱇ(피에사), Ⰳ(감마) 정도의 글자만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점점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니케르 문화는 자소크력 기준 300년경, 셀렌드리얼 전례력 기준 -1703년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초연대기의 끝에 가까워지면 니케르는 고위 사제계급 이외에는 마법을 쓰는것이 금지되었는데 마법을 비밀리에 연구하던 집단이 유배되어 니케르 문화에서 떠나게 되었는데, 이들이 지금의 콰미드들의 직계조상이라 여겨진다.
니케르 문화는 처음에는 전설로만 여겨졌으나, 니케르 천이라 불리는 곳이 명백하게 있었고, 니케르 천 상류에 있는 도시 니켈리아에서 남쪽으로 30km 부근에 대규모 유적이 발견되어 니케르 문화는 진실로 판명되었고, 유적에서 원초연대기의 손상된 문서를 확보하였었고, 로토시아의 간척사업 도중 진흙속 항아리 안에 보관되어 공기와 차단된채 보존된 원초연대기가 발견되며 전기 혼란시대의 이해가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전기
중간기
혼란시대 중간기 시대는 룩시아르와 에페이로스의 분립으로 인한 일련의 시기를 이르는 것이다. 고대시대의 니케르 문화 이후, 시트레나 강에 정착한 일련의 민족들은 서로 작은 고을을 이루며 살았고, 그 분포는 북쪽으로, 중앙으로, 더 아래로 간 사람들이 생겼다. 초기의 그 수는 얼마 되어보이지 않는다.
중간기에 확인되는 문명권은 페투치아와 레조넌스 일부 지방뿐이다. 실제로 큰 문명의 융성하였던 곳은 페투치아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나 시트레나 강을 중심으로 분산된 도시국가들, 그리고 주도권을 잡은 두개에서 세개의 세력이 대립한 역사가 주된 역사의 부분을 차지하는데, 현재 페투치아인의 조상격인 에페이로스인, 그리고 레조넌스의 조상격 되는 룩시아르인이다. 피니투라인의 경우엔 역사가 다소 독립적인 경향이 발생했는데, 즈베스타이아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다만, 룩시아르와 에페이로스의 세력균형이 파괴되어 혼란시대 중기로 넘어갈때에 역사의 흐름은 합쳐지게 된다.
즈베스타이아의 후예로서, 현재의 타카시아가 즈베스타이아의 위치와 가장 가까울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강 유역에서 물러난 이후 해안으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제로소의 전신으로 추정된다. 그당시 명칭으로는 메디아 해를 당시엔 "아키아(Αρχία)" 라고 불렀으므로 아키아의 도시라 하여 "아키스타이아(Αρχίσταια)" 라고 불렀다. 물론 아키스타이아와 제로소의 위치가 완전히 같은것은 아니며, 모종의 이유로 물속에 잠긴 이후 그 잔재 위에 세워진것이 제로소이다.
여기서, 즈베스타이아(Ζυεβεσταια)라는 명칭은 세살르디아(Σεσαλδια)와 대비되는데, 세살르디아는 역사속에서 발견되는 확실한 문명이자 고고학적 증거가 존재하는 그 시대의 가장 큰 도시로서, 즈베스타이아와의 전쟁으로 에페이로스와 룩시아르의 분리가 일어난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날개가 있는자와 없는자의 구분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중기
후기
문명시대
문명시대는 시띵이 이 세상에 온 이후를 문명시대라고 일컫는다. 문명시대라 하는 이유는 시띵이 오기 이전에는 혼란시대가 지속되었었고, 그가 질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명시대는 지금의 피페레 제국이 등장한 시대이며, 이때 시띵이 태어난 자소크력기준 2003년, 셀렌드리얼 전례력 기준 0년을 문명시대의 시작으로 규정한다. 문명시대는 전부 피페레 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문명시대의 극 초반부는 시띵의 여행에서 비롯되며 시띵이 로토시아를 세우고, 제국을 선포한 그때부터 제1제국이라 한다.
문명시대는 제1제국, 제2제국, 제3제국, 제4제국 으로 나누며 각 시기마다 중대한 사건이나 변화를 기준으로 시대를 나눈다. 제1제국 시기는 시띵이 승천한 직후 세워진 시띵의 제자들이 아도르카를 거치며 국가의 기초가 생기고 모든 제자들이 죽었을때 제1제국 시대는 끝났다고 보며, 제2제국 시대로 제1제국은 승계되었다고 본다. 제1제국 시기때는 아도르카의 전제군주정, 그리고 제정일치 제도가 있었으며, 아도르카의 직속 자문기관인 대회의(ⲚⲨⲢⲨⲉ ⲚⰋⰃⲐϤⲀ)가 사실상의 입법기능과 사법기능을 수행한것이 특징적이다.
제2제국 시기는 제국이 안정화되고 농업생산력이 증대하며 빈자와 부자가 생기고, 나중에는 귀족이라는 계층과 농노라는 계층, 그리고 도시에 속하며 수공업자등의 전문직업을 가지고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상공업 계층이 분화하며 귀족공화정 체제가 자리잡는다. 이때 농촌에는 귀족계층의 사유화된 재산인 장원(Ѷαρνολ)에서 농노계층을 거주시키며 자유를 예속시키었고 장원을 가진 귀족들끼리 지방에서 모여 사교활동을 벌이게 되는데, 이 사교의 장을 "미오브(Μιον)" 이라 불렀고 이것은 제3제국 시기에 이을어선 각 왕국의 지방의회가 되었다.
제3제국의 시기에 초반에는 세습하는 귀족계층이 등장하였고, 이 귀족계층과 아도르카의 어전회의, 즉 입법기구겸 자문기구에 속하는 "니고라(Νιγορα)"가 등장하였고, 이는 아도르카가 세습계층인 귀족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되었다. 가장 큰 사건은 2700년대쯤 있었던 사건으로, 귀족계층에서 충분히 교육받은 세습귀족이 등장하고, 종교적 윤리에 따라서 재판을 개시하는 기존의 사법체게는 세속화된 세상의 이치와 괴리감이 생기게 되었고, 귀족계층의 요구로 아도르카는 태양궁 합의(2798)에 의해 앞으로의 사법은 로토시아에 유학와서 법과 윤리에 대해 교육을 수료하고, 아도르카의 인정을 통해 판사의 지위를 지닌 자가 재판을 주재한다는 합의를 이루어내며 종교권력이 사법권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제3제국의 중반에 이을으면 큰 사건이 일어나는데, 기존의 상공업으로 자유인으로 살아가던 도시인들중 상공업자들을 모은 모임인 "미머시(Μιμρσι)"를 만들고, 이곳에서 자본이 집약되자 강력한 자본가 계층이 등장하며 지주들로 구성되어 있던 귀족계층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고, 기존 지주계층의 텃세에 결국 로토시아에서 담판 (로토시아 중재)를 벌였고, 로토시아 중재를 통하여 아도르카는 권리장전 (3577)을 선포하였다. 이 권리장전이 있고 얼마 뒤에, 새로운 상공업을 기반으로한 귀족계층은 결국 사회불평등의 증가라는 결과로 나타났고, 이에 큰 우려를 하던 미라토시아의 수사 마르차시아 미라토시오 솔로모스는 아도르카에게 직접 어전앞에 나아가 호소하였고, 이것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자 그의 고향이었던 미라토시아에서 농민집회가 열렸고 (미라토시아 농민집회 (3782)) 이것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결국 수도 로토시아에서 로토시아 민중궐기 (3785)가 일어나가 고심하던 아도르카는 농노해방령 (3786)을 선포하며 큰 사회적 변화를 겪게 된다.
제2제국의 마지막 시기인 2800년대에 이르면 지방에 널리 퍼져있던 지방의회들과 상공업자들이 모여있던 미머시들이 혼잡하게 경쟁을 벌이며 내부적인 혼란이 증대되자, 이를 우려한 아도르카는 권리장전에 따라서 의회에 간섭할 수는 없으나, 중앙정부가 필요하다는 요구를 하게 되고 아도르카는 당시 시띵교의 교리적으로도 매우 타락해있었던 당시 귀족들에게 통첩으로서 자신이 권리장전을 계속해서 이행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전제되어야 한다며, 중앙정부를 세우는것에 동의할것을 요구했고 장정 3년간 이를 조정하며 5년쨰 되는 해에 지금의 제국의회를 수립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또한, 제국의회에서 수상을 의원내각제 방식으로 선출하여 내각을 꾸리는 체제가 생겼고, 이때가 3900년대 초이다. 이후 3999년, 수상은 이제 의회의 중재자에서 중앙권력을 통제하는 통치자로 그 성격이 변모하며 지금의 체제를 이루게 되었고, 이때 4000년대가 시작되며 제2제국 시대는 끝나게 된다.
제3제국 시대는 자소크력 4천년대에 시작하였으며, 제국의 행정체제가 명확해지고 많은 제국의 중앙정부의 변천사가 존재하였다. 제3제국 초반에는 일부 항구에서만 무역이 사치품을 위주로 소수 진행되는 수준이었으나, 이렘나 철랑대 수교 (4491)을 시작으로 개방적인 외교환경의 의지가 생기게 되었고, 한카 발견 (4596)을 통하여 쇄국중이던 한카 교회국과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들의 기술수준에 감탄하며 개화의 의지가 확고해졌다. 제3제국 후반에 이르면 에볼 계약 (4971)으로 세계의 초강대국인 자소크 철학단과 동등한 관계로서 계약까지 성립하며 온전히 외교적 고립에서 탈출하게 되었고, 북아트리아 통합 (4961)을 통해 동방계 콰미드들까지 모두 수용하게 됨과 동시에 메티샤 해를 향한 해안이 더욱 확장되었으며, 에뢴게레티 합병 (4979)을 통해 콰미드 뿐만 아닌 다른 민족들까지도 모두 수용하는 다종족 제국으로 변모하자 제3제국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 판단하여, 자소크력 5000년을 끝으로 제3제국 시대는 끝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