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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츠노주의
環輪主義
지위 신세이 왕국의 불법단체
창시자 기타노메이 히츠노
시작 시기 5879년
지도자 훈쇼(分張)



개요

하야다테 츠쿠바하나노가쿠의 실정과 이로 인해 촉발된 대학생층의 시위 과정에서 성장한 신세이 사회주의 세력과 키타노메이 히츠노가 결탁해 만든 세력인 신세이 대학 총평의회의 기본주의로 사회, 공산주의와 비슷한 성향을 보이지만 군주주의 철폐를 토대로 훈쇼(分張)라 불리는 지역 단위의 소사회주의를 목표로 하며 최종적으로는 사회를 온전히 탈피하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다.

배경

카이레이 개혁 이후 신세이 왕국하야다테 아카하나노가쿠의 치세에서 "신코우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경제, 정치, 사회적 성장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5721년 아카하나노가쿠의 서거 이후 즉위한 하야다테 츠키키하나노가쿠는 생전 선왕의 기대를 받으며 총명하게 자랐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앓던 지병과 즉위 이후 스트레스가 일으킨 합병증은 츠키키하나노가쿠로 하여금 이른 죽음을 맞게 했다. 이후 즉위한 어린 나이의 하야다테 츠쿠바하나노가쿠는 선왕 만큼의 카리스마와 휘하 대정의 의원들의 담합과 부패를 막아낼 정치력이 전무했다. 이런 상황 속 도쿠메이 37년에 이르자 기존의 선진적이었던 정치체제는 부패했으며 활발하던 내수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는 신세이 내의 기업의 도산으로 이어졌고 도쿠메이 39년 대기근으로 신세이 왕국의 산업기반이었던 농업이 사실상 괴멸을 맞이한다.

이런 상황 속 신세이 동경 왕립 대학의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여타 대학생, 청년층을 중심으로 군주의 완전한 정치로부터의 배제와 더 나아가 극단적으로는 군주제 폐지 성향을 보이는 학생들이 증가해갔다. 이에 위기를 느낀 기득권 황족과 배후의 정치 문벌 세력들은 이를 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존왕파 학생들을 지원해 반군주주의의 세를 억제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청년층에서 시작된 정치권에 대한 반발은 경제 활동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장년층에게로 퍼져나갔고 이는 집단 파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신세이 동경 왕립 대학 총학생회의 31대 회장이었던 키타노메이 히츠노는 군주제 폐지와 더 나아가 사회적 계층구조를 타파하고자 하는 탈사회론을 주장하며 신세이 내부에서 암약해 있던 신세이 사회주의 세력과 결탁하게 된다. 이후 신세이 대학 총평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히츠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히츠노주의를 평의회의 기본 신조로 삼으며 본격적으로 기득권 존왕파 세력과 대립각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관련 사건

하마츠라정 히츠노주의자 국가전복 기도 사건

각주

  1. 2025년 4월 11일 09시 44분 25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