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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그래 공화국/역사 · 그래그래 공화국/정치 · 그래그래 공화국/문화 · 그래그래 공화국/기술

그래그래 공화국의 역사이다.

건국 이전

17세기~31세기

지정국

1665년 건국된 그래그래 건국 이전부터 존재하던 절대왕정 국가이다. 민족은 현재 그래그래 공화국하고 같이 일산인과 그래인이 있었지만, 일산인만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당시 리지트파[3]는 지정국의 민족 중 일산인[4]만을 우대하고 그래인을 탄압하며 나라를 운영하였다.

일천고 혁명

3087년 6월 12일, 대부분의 그래인이 다녔던 일천고등학교에서 리지트파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지정국 왕실은 그들의 시위가 금방 잠잠해질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천고 시위는 학교 단위에서 점차 커지면서 그래인 전체의 시위로 확대되었다. 그렇게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지정국 왕실은 시위를 멈출 수 없어 그래인을 시위가 일어난 지역인 염방[5]에 보낸 뒤, 그 지역을 다른 지정국 영토와 접촉할 수 없게 폐쇄하였다. 결국 그래인은 염방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밖에 없었고 3088년 5월 5일, 그래인의 나라인 그래그래 공화국을 선포한다.[6]

분단기

31세기~36세기

체제 정비

그래그래는 지정국의 왕정 체제에 분노하여 만들어진 국가였기에 공화정을 택하여 투표로 행정 수반을 뽑았다. 그리고 일천고 혁명을 계승하여 행정 수반을 전교회장으로 칭하고 이를 감시하는 학생부를 만들었다. 초대 전교회장인 라피테쿠스 1세[7]는 그래그래의 기틀을 다지고 간단한 법들을 만들었다.

일산인 대이동

3448년, 지정국은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결국 리지트파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고 있었고, 그러던 중 등장한 것이 바로 라블 1세[8]이다. 라블 1세는 리지트파에게 지정국의 위기를 타개할 계책으로 다수의 일산인을 그래그래로 이주시키자고 주장하였다. 리지트파는 지정국을 포기하는 행위라며 강하게 비판하였지만, 라블 1세의 설득으로 계획을 실행하였다. 그렇게 다수의 일산인이 그래그래로 이주하였다.[9]

일산인 대이동의 영향

일산인 대부분을 그래그래로 이주시킨 결과, 그래그래 내에서 일산인과 그래인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래인은 그래당, 일산인은 일산당을 만들며 양당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일산인의 수가 점차 많아졌고 그래그래가 곧 다시 지정국에 편입될 수도 있다는 설이 돌면서 일산당 지지자들의 수가 월등히 많아졌다. 결국 일산당이 집권을 하게 되면서 또다시 지정국이 그래그래보다 다시 우세해졌다.

간선제 도입

3531년, 일산당이 집권하던 중 당시 전교회장이던 라블 3세[10]는 라블 1세의 소망이었던 간선제를 이뤄내기 위하여 간선제를 도입하였다. [11] 간선제 도입 이후 일산당의 권력이 더욱 강해질 것 같았지만 그래당 또한 이 사건 이후 단합하여 일산당의 집권을 끝내기로 하였다. 그때 등장한 자가 바로 이아스이다. 이아스는 일산당의 집권을 끝내기 위해 모든 그래인을 단합시켰고 간선제에서 선출되어 집권하게 된다. 그리고 3534년 8월 22일, 간선제는 도입하였던 라블 3세가 승복하며 폐지하게 된다.

헌법 제정

3535년 1월 1일, 이아스 정부는 그래그래에 제대로 된 법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라며 그래그래 최초로 근대 헌법인 그래그래 헌법을 제정한다.[12] 그러나 헌법에 의거해 선출된 입법부는 대부분이 일산당, 혹은 이아스 정부에 반대하는 그래당 의원[13]만이 존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로 전교회장 탄핵 소추를 진행하였고 계속된 정당 내 갈등으로 이아스 정부는 단 2주 뒤인 3535년 1월 15일, 헌법을 폐지하며 스스로 하야하였다.

지정국 불법 점거

3535년 1월 16일, 전교회장이 하야하고 그래당이 분열되고 그래그래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지정국으로 이주해있던 라블 3세는 리지트파와 함께 무장하여 그래그래에 들어왔다. 그래그래의 거센 저항을 예상했지만 대부분의 그래인들이 분열되어 있었고 전교회장과 함께 대부분의 학생부도 없어[14] 단 하루만에 일산당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그래그래의 국권을 빼앗았다.[15] 그 후 해외에서의 출입을 금지시켜 학생부의 출입을 막고 그래그래를 지정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국권 침탈기인 일산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일산 강점기

36세기

이아스 정부 재출범

3535년 2월 3일, 지정국은 그래그래를 정복 후 라블 3세는 리지트파를 끌어내리고 본인이 황제가 되어 국호를 일산 제국으로 변경했다. 그 후, 그래인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하여 이아스 정부를 재출범 시켰다. 그러나 명목상의 전교회장이었고 실제로는 내정에 관여할 수 없었다.

민족 말살 정책

일산 제국의 최종적인 목표는 그래인을 일산인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먼저 일산 제국의 사상 교육을 시키고 일산 제국을 따르면 그에 맞는 상금을 주어 친일산파[16]를 양산했다. 그런 다음, 그래그래의 독립 운동가들을 대부분 나라에서 추방시키거나 사형시켰다.

임시 정부 수립

3540년, 추방당하지 않았던 독립 운동가 라피테쿠스 15세, 디야 등이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학생부였던 라지르[17]와 이아스를 중심으로 그래그래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8] 당시에 보이는 곳에 설치한다면 일산 제국에 의해 소탕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지하, 산림 등 찾기 어려운 곳에 다양한 임시 정부 건물을 세운 후 일산 제국이 발견하지 못한 건물들을 사용하였다. 임시 정부는 그래그래의 독립을 위하여 해외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일산 제국이 먼저 대량의 자본을 주는 대신 내정에 간섭하지 말아달라며 외국과의 협약을 마쳤었다.

학생부 피격 사건

3560년대, 점점 독립의 가망이 없어 보였고 친일산파의 수가 늘어나면서 임시 정부 내에서 배신자의 수가 급증하였다. 그리고 친일산파 문제에 대하여 임시 정부의 지도자였던 라지르와 이아스가 서로 대립하였다. 라지르는 독립할 가망이 없기에 친일산파가 늘어난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였지만 이아스는 친일산파를 옹호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하며 둘의 사이가 멀어졌다. 그리고 3571년, 일산 제국의 간부인 라케는 이 두 명이 있던 임시 정부를 찾아내 급습하였고 라지르는 본인의 총을 이아스에게 던진 뒤, 라케를 못 움직이게 하여 총을 쏘라 하였으나 이아스는 그 총으로 라지르를 저격하였다.[19] 사실 라케에게 임시 정부의 위치를 알려준 것이 이아스였으며 3560년대부터 이미 친일산파였던 것이다.

독립군 창설

3575년, 라피테쿠스 15세는 해외로 나가 돌아오지 못하던 학생부를 발견했다. 그 후, 학생부와 함께 해외에서 몰래 군대를 모아 독립군을 창설하였다.[20] 그 다음 이들을 데리고 일산 제국으로 가는 것이 문제였는데, 당시 외교를 위하여 일산 제국은 외국인들의 입국을 조금씩 허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라피테쿠스 15세는 모든 독립군의 신분을 속여 조금씩 일산 제국에 입국시켰고 5년에 걸쳐 모든 독립군을 그래그래 영토인 염방에 집결시키는데 성공했다.

독립 전쟁

3582년 5월 3일, 독립군은 염방 한가운데서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며 일산군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가망이 없어 보였으나, 독립군은 염방만을 거점으로 끝까지 싸웠고, 결사 항전을 외치며 사기가 오른 독립군은 염방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3582년 7월 6일, 모든 일산군이 염방에서 철수하면서 그래그래 공화국은 광복을 맞이하였다.[21]

혼란기

36세기~39세기

친일산파 청산

3582년, 광복 직후 전교회장이 된 킨마는 전쟁으로 일어난 피해들을 복구해야했다. 그리하여 복구하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산파들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한 뒤 국가에서 추방시켰다. 그 후 몰수한 재산으로 전쟁 피해를 복구하였다.

국력 강화

3584년, 킨마 정부는 일산 제국의 간섭을 막고자 국방력을 강화하고 일산 제국으로부터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산 제국은 그래그래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계속하여 내정에 간섭하려 하였다. 그러자 킨마 정부는 일산인 관리들을 모두 해고하고 독립 운동가를 관리로 등용하였다. 또한 일산 제국과의 모든 수교를 거부하였다.

일산 제국 쿠데타

3790년대, 일산 제국 내에서는 황제인 라블 가문과 예전에는 리지트파였던 파지리 가문이 서로 대치 상태에 있었다. 그러던 중, 3798년 파지리 가문은 군권을 장악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후 3802년 파지리 가문이 승리하며 파지리 트리트파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7.22 부정 선거

3829년 7월 22일, 전교회장 선거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그래당과 일산당[22] 후보의 득표차가 5% 차이로 일산당 후보가 승리하였지만, 투표율이 170%였다.[23] 그래그래 내에서는 일산당내 비리를 조사하였지만 부정표에 관련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그래당 후보였던 포쿠가 일산 제국의 음모가 분명하다며 일산 제국을 향해 조사를 요청하였으나 일산 제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렇게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못하는 듯 했으나 일산 제국 황제인 트리트파가 부정 선거를 명령한 자료가 발견되면서 일산 제국이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트리트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일산 제국을 모함한다는 명목으로 3830년, 그래그래를 침공했다.[24]

그일전쟁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그래그래는 영토의 70%가 일주일 만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부정 선거가 인정되어 전교회장이 되었던 포쿠는 군대를 정비하여 최종 방어선을 확보했다. 그리고 당시 일산당 또한 이러한 침공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여 그래그래를 도와 참전하였다. 그렇게 일산 제국과 그래그래 공화국의 전쟁은 단숨에 전세가 역전되었고, 3831년 3월 1일 트리트파를 그래군이 사살하면서 전쟁은 승리하였다. 그러나 포쿠 정부는 이대로는 또다시 그래그래와 일산 제국의 갈등이 심해져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판단하여 전쟁을 멈추지 않고 계속 진격하여 일산 제국과 그래그래를 통일하였다.[25]

통일에 대한 평가

그래그래 공화국의 갑작스러운 통일로 인해 이 통일에 대해서는 다양한 역사적 평가들이 있다. 첫 번째는 두 민족이 드디어 하나로 합쳐지는 완전한 통일이었다는 평가이다. 계속된 전쟁으로 서로 피해만 입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통일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두 번째는 두 민족이 통일되긴 하였으나 전쟁을 통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는 입장이다. 아직 통일하기에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이렇게 통일했다가는 또다시 분열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여러 평가가 존재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현재의 그래그래 공화국 영토가 확립되었으며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줄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체제 정비기

39세기~41세기

그래통령제 시행

3831년 4월 19일, 포쿠 정부는 그래그래 공화국의 새로운 개혁이 필요하다 생각해 지금까지 사용하였던 행정 수반을 전교회장에서 그래통령으로 바꾸고 학생부의 역할을 정비한 그래통령제를 시행하였다.[26] 그리고 양당제의 성격을 약화시키기 위해 새로운 당인 염경당[27]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아직 일산인과 그래인의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으며 다시 분열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포쿠의 임기가 끝났고, 초대 그래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염경당이었다. 그리하여 초대 그래통령인 유재 정부가 출범했다.

민족 분리 정책

유재 정부는 지금까지 민족을 통일하려고 했던 전 정부들과 달리 민족을 분리하였다. 유재는 민족끼리 당을 이루어 서로 경쟁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데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며 서로의 민족을 통합할 것이 아닌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절대 민족을 차별해서는 안 되므로 새로운 헌법인 신 그래그래 헌법을 완성하였다.[28] 이러한 정책의 시행 이후 민족 간 다툼이 매우 줄었으며 당명은 여전히 민족의 이름을 가져왔지만 민족과 지지하는 당이 다른 사람들도 늘어났다. 또한 새로운 당도 많이 생겨, 그 결과 다당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토지 개혁

그일전쟁 이후 그래그래 영토 대부분이 황폐해지고 주인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3834년, 유재 정부는 토지 개혁을 실행하였다. 유재 정부는 유상 매입 유상 분배 형식으로 토지 개혁을 하여 국민들이 균등하게 토지를 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국민마다 토지를 얻게 되었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화폐 개혁

3835년, 유재 정부는 시장 경제를 정비하기 위해 그래은행을 설립하고 새로운 화폐인 원(₩)을 발행하였다. 그래그래 공화국에서 처음으로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시장 경제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개혁으로 그래그래 공화국은 점점 근대화에 성공하여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체계를 완성해갔다.

문화 개혁

4054년, 당시 그래통령인 라피테쿠스 시레는 그래그래의 문화 활동을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 대부분의 규제를 완화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갈등이 발생하는데 당시 학생부장 델둔은 이러한 시레의 규제 완화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델둔은 문화가 변질되지 않기 위해선 어느정도의 규제도 필요하다고 말하였지만 시레는 문화는 규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모든 규제를 폐지하였다.

1.19 저격

시레 정부와 학생부는 문화 개혁으로 인한 의견 격차로 서로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그러던 와중 시레 정부는 '학생부 사법권 박탈안'을 내세우며 학생부의 권력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4056년 1월 19일, 학생부장 델둔은 그래통령 시레와 술자리를 가진 뒤, 그 자리에서 총으로 시레를 저격하였다.[29]이 사건은 그래그래 공화국 최초의 그래통령이 사살된 사건이었으며 이 이후 그래통령의 경비가 훨씬 강화되었다.

교육 개혁

1.19 저격 이후 그래통령이 된 수장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초등 교육과 중등 교육을 정비하였다. 또한 대학교 입학 방법으로 본인의 이름을 딴 수장고사를 완성하였으며 이 제도는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그 후 4078년, 라피테쿠스 사나 정부는 그래그래 공화국의 중등 교육을 의무 교육으로 정하였다.

통일기

41세기 이후

중임제 허용

4554년, 루드 정부는 그래통령의 임기를 기존 5년에서 8년으로 늘리고 중임을 허용하였다. 학생부의 반발의 예상되었지만 당시 학생부는 전부 친루드 학생부밖에 없었기 때문에 통과되었다.

무정부 시대

4602년, 그래통령의 임기가 늘어나면서 그래통령의 권력이 학생부보다 우세해졌다. 그리고 티투스 정부는 학생부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분노한 학생부는 그래통령 탄핵 소추를 진행하였고, 끝내 티투스 정부는 탄핵되었다. 그러나 이대로 다음 정부가 나왔으면 됐지만 학생부는 그래통령이 문제라며 그래통령 자체를 폐지해버렸다. 그렇게 약 1년간의 무정부 시대가 있었으나 국민들이 학생부의 권력 독점에 항의하여 다시 그래통령이 취임하였다. 그러나 임기는 8년에서 4년으로 줄였고 중임은 계속 허용되었다.

현대 그래그래

체제 정비를 모두 끝마치고 그래그래 공화국은 현재도 많은 갈등과 역경들이 있다. 그러나 현대 국가의 체계를 잡아가며 국가다운 국가의 모습을 보이며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공화국이 되었다. 앞으로도 그래그래 공화국은 국민을 위해 발전할 것이다.[30]

도보게

그래그래 공화국

각주

  1. 2024년 5월 18일 13시 10분 00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3. 지정국의 왕호이다.
  4. 지정국의 지배층이어서 지정인이라고도 불린다.
  5. 일천고가 있던 지역, 훗날 그래그래 공화국의 수도가 된다.
  6. 3088년, 그래그래 공화국 건국
  7. 라피테쿠스 가문의 시초, 그래그래 공화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가문이다.
  8. 라블 가문의 시초, 지정국의 실권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다.
  9. 3488년, 일산인 대이동
  10. 일산인 대이동의 성과로 대부분 일산당에서는 라블 가문이 후보로 나왔다.
  11. 3531년, 간선제 도입
  12. 3535년, 헌법 제정
  13. 훗날 그래당과 분리된 염경당을 창당한다.
  14. 학생부는 당시 다른 나라로 가서 협약을 맺고 있었다.
  15. 3535년, 그래그래 국권 침탈
  16. 일산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산 제국을 지지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17. 유일하게 다른 나라로 가지 않았던 학생부였다.
  18. 3540년, 임시 정부 수립
  19. 3571년, 학생부 피격 사건
  20. 3575년, 독립군 창설
  21. 3582년, 광복
  22. 킨마의 정책 이후 일산당이 거의 해산되기 직전이었으나 39세기가 오면서 다시 그래당과 비슷한 힘을 얻었다.
  23. 3829년, 7.22 부정 선거
  24. 3830년, 그일전쟁
  25. 3831년, 그래그래 통일
  26. 3831년, 그래통령제 시행
  27. 수도 염방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28. 3833년, 신 그래그래 헌법 제정
  29. 4056년, 1.19 저격
  30. 그래그래 공화국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