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4650년 초부터 진행된 아마자쿠라 내에서의 구조적 문제점으로 쌓여온 불만과 이것이 폭발하면서 아마자쿠라 내에 큰 변화점을 가져온 일련의 사건과 그 경과에 관해서 작성하는 문서이다.
아마자쿠라 황실 폭탄 테러 사건
“ 천하의 광대이자, 자신이 하늘의 아들이라 믿는 미친 개여! 자수르만의 분노를 받아라!
” — 당시 폭탄을 던진 자수르만계 분리주의자가
4646년 아마자쿠라의 황실 대부분이 참석한 행사에서 자수르만계 분리주의자가 사제폭탄을 던져 황실 대부분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자수르만 분리주의 단체인 하얀늑대단 소속이었고, 주변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칼을 휘두르다가 경호원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아마자쿠라 정부는 큰 혼란에 빠졌고 당시 아마자쿠라 내에 암암리에 존재하던 자유주의 파벌, 공화주의 파벌과 분리주의 파벌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아마자쿠라는 해체 수순을 밟기 시작한다.
텐메이 공화국 건국 선언
“ 오늘 우리는 지독했던 옛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려고 합니다. 검열도 비밀경찰도 그 무엇보다 황실도 이제 없습니다. 아마자쿠라, 아니 텐메이인들의 이 땅은 우리의 것입니다! 텐메이인들이여! 잃을 것은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모든것이니! 새 지평을 열어나가자!
” — 텐메이 공화국 건국 선언 연설에서
황실이 흔들리자 가장 먼저 환호한 것은 공화주의자들이였다. 텐메이 민주당을 필두로 지하에서 활동해오던 여러 공화주의 세력들은 아마자쿠라가 찢어지는 것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자수르만계 테러범의 사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였지만 이 상황을 기회로 삼아 새로운 나라를 새우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당시 건국 선언에는 수많은 텐메이인들이 북새통처럼 모여 새로운 국가에 대한 텐메이인들의 열정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이러한 새 나라를 향한 열망은 분명히 더 좋은 아마자쿠라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많은 텐메이인들은 생각했었다.
아마자쿠라 내전
“ 우리 아마야스 주 정부는 공식적으로 구 아마자쿠라 내부로 영토를 확장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 — 자소크 철학단 아마야스 주 정부의 공식 발표에서
“ 우리 민족의 영토를 다시 되찾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더 이상 자수르만의 암흑기는 없다.
어느 대가를 치르든 우리 선조의 땅을 되찾을 것이다!” — 자수르만인의 분리주의 집회에서 하얀늑대단의 수장 어쉬파즈 셰아라프가
아마자쿠라 내에서 일어난 정치적 공백상황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아마야스 주 정부는 즉각적으로 행동하였다. 자소크 정부측의 확장 반대 의견까지 무시하고 아마자쿠라 영토 내로 황색 깃발을 걸던 아마야스 주 정부는 주변국들, 특히 이렘나의 반 자소크 감정을 건들여 이렘나까지 개입을 하게 만들었다. 다수의 거대세력이 뒤엉켜 큰 혼란이 빚어진 텐메이 반도에 평화유지 명목으로 밀리토호스 타코뤼 왕국까지 개입을 하며 텐메이인들의 독자적인 국가라는 공화주의자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자수르만계 독립 세력은 독립선언 이후 사흐러이스탄 본국에 충성맹세를 하여 물적 인적 지원을 받았고 이렇게 많은 진영이 뒤섞여 생존경쟁을 벌인 아마자쿠라 내전은 4650년 2월 14일, 이요에서 열린 평화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아마자쿠라가 해산되고 국경이 확정되며 종료되었다.
이렘나 철랑대의 보호 전쟁
4648년, 셰헤카사 제도의 텐메이 교단이 아마자쿠라의 텐메이 교단으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았다. 아마자쿠라 및 북부의 교역로가 주 수입이었던 셰헤카사 제도의 기사단은 셀니키히의 철각으로 아마자쿠라의 보호에 대한 요청을 하였고, 554대 철랑대장 r'Acheshiyn k'reytzevahar[3]가 이것을 수용하여 안건에 대한 철각 회의가 열렸다.
이렘나 철랑대 전체 외부 교류의 20%를 맡고 있는 아마자쿠라의 붕괴는 이렘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며, 특히나 이렘나의 동부지역[4]의 마법기사들은 외부 마법 분석의 차질을 내세워 아마자쿠라 북부의 개입을 결정하였다.
무엇보다, 자소크 철학단이 최근 아야마스를 개척한 것이 북메디아 지역에 대한 패권 확장으로 인식한 이렘나는 자소크 철학단 소속 아야마스의 확장 저지를 목표로 아마자쿠라 북부 해안에 강습한다.
아마자쿠라 북부 전쟁
후유가 신궁의 관리인이자 아마자쿠라 북부 클랜이었던 미츠마에 클랜[5]은 이렘나의 개입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늘리고자, 이렘나의 개입 직전에 아마자쿠라 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철각의 수뇌부는 이 움직임을 파악하고 미츠마에 클랜과 군사 협정을 제안하였고, 이렘나와 미츠마에 클랜의 군사적인 제휴를 통해 아마자쿠라의 본국과의 보호 및 복속 전쟁을 벌인다.
반면, 미츠마에 클랜의 남부에는 사사키 클랜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미츠마에 클랜의 준동을 경계하여 북부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행하였다. 이렘나의 본대가 도착하지 않은 4648년 후반에는 이들의 공세로 인해 후유가 지역까지 물러났으나, 이렘나의 본대 개입으로 인하여 전쟁은 사사키 지역 전체에 대한 산발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이것이 사사키 전쟁이다.
창백한 낙엽
사사키 전쟁이 수렁으로 빠지고, 동부에서 아마자쿠라인들이 이렘나와 관계 없는정권을 형성한다는 소식을 들은 철각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철각은 빠른 전쟁을 위해 틸루크레아로 인한 기류 불균형 전술 사용과 금속 독 사용을 허가했으며, 사사키에서의 저항 세력에 대한 무차별 제압을 명령하였다.
“ "눈에 보이는 것은 곧 필요없는 것. 철각에 충성하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 — -Marineka Flapi[6]
사사키 지방의 반 이렘나 세력은 빠르게 진압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부수적인 피해에 대한 책임은 사사키 지역에 잔학한 피해를 남겼다. 특히나, 아마자쿠라 동부와 아마자쿠라 중부를 잇는 가도 역할을 했던 사사키 지방의 남부 피해는 극심했다.
“ "4648년, 사사키의 가을은 창백히 질렸다. 단풍이 든 숲길 사이로는 금속 독에 오염되어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못한 몸뚱아리가 굴러다녔다. 이렘나의 검은 깃발과 미츠마에의 푸른 깃발이 잔인한 바람 속에 흩날리며, 오염된 자들의 입명을 재촉했다."
” — -사사키측의 기록
서부 가도 전쟁
아마자쿠라의 중부를 차지한 이렘나 철랑대는 생각지 못한 위협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자수르만인들의 봉기였다. 아마자쿠라의 보호 명분을 내세운 이렘나 철랑대는 아마자쿠라의 전복을 바라는 자수르만인들을 경계하였고, 산발적인 전투가 생긴다.
사호노트의 반란과 붉은 벚의 행진
아마자쿠라의 중부지방에는 야마토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압으로 인해 도주한 아투제르인들의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교역을 통해 이렘나 철랑대의 아투제르인에 대한 처분을 들은 바가 있었기에 이렘나 철랑대의 개입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이것은 아마자쿠라 중부 지역 장악에 차질을 맺어지게 한다. 이렘나는 아마자쿠라 사회에 아투제르인에 대한 악소문을 퍼트리고, 악소문에 대한 사실을 꾸며내기 위해 "나요토 사건"[7]을 일으킨다. 아투제르인들은 100년동안 친우나 마찬가지였던 아마자쿠라인들에 의하여 이렘나 점령군정에 잡혀가게 된다.
“ "아투제르인들은 간교하게 짝이 없습니다. 아마자쿠라의 형제들이여. 그들은 우리 이렘나의 지방에 무단으로 진입하여 우리의 전승을 끊으려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대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 것은 차후의 악을 위한 것이니, 우리를 도우십시오. 그 반짝거리며 웃는 얼굴 뒤에는 사악한 간계가 있을 것입니다."
” — -아마자쿠라에 포고된 선언
4649년 5월, 아투제르인들은 최후의 반란인 "사호노트의 반란"을 일으킨다.
“ "우리의 오랜 친구조차 우리를 배신하고, 이젠 우리 혼자 이곳에 남겨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빛이 마저 비치는 평원에서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셀레디온 사호노트
”
아투제르인들은 대부분의 이렘나 점령 지역에서 살해당했다. 이때, 이렘나의 기사들은 불타는 깃발에 아투제르인들을 산 채로 매단 채 행진하였고, 불에 탄 깃철과 살점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벚꽃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붉은 벚의 행진이라고 불렀다. 살아남은 아투제르인들은 전쟁 수행을 위한 생체 마력매게체로 쓰였으며, 아마자쿠라 북중부의 아투제르 커뮤니티는 이 사건으로 절멸되었다고 한다.
“ "불타는 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네.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잔인하게 배척받는 자들의 비명이. 우리는 이들의 비명에 눈을 감았고, 언젠간 그 짐을 똑같이 지고 가겠지."
” — -후유가의 어느 검객
자소크와의 충돌
북부에서 학살의 소식을 들은 자소크 철학단는 이렘나의 남부 확장을 저지하고 아야마스의 방위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이렘나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동부 독립전쟁과 미츠마에 반란
미츠마에 클랜은 이렘나 철랑대의 잔학한 행위와 아마자쿠라에서의 영향력 증강을 두려워하여 4649년 7월, 반란을 일으킨다.
종결과 아다키의 성립
이렘나 철랑대는 아마자쿠라의 보호와 안정을 내세웠으나, 타 세력의 개입과 아마자쿠라 내부의 반발로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특히나, 자수르만 계열의 반란군과 자소크 철학단, 밀리토호스 타코뤼 왕국의 세력은 이렘나의 확장을 가로막았고, 이렘나에 우호적인 아마자쿠라 집단의 유지를 바랬던 이렘나 철랑대는 목표 달성에 실패한 채 작전의 중단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점령지에서의 아투제르인에 대한 학대와 무리한 확전은 주변 세력의 반발을 세게 불러왔으며, 타 지역의 아마자쿠라인들이 이렘나 철랑대를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렘나 철랑대의 본 목적은 아마자쿠라의 부활이었으나, 애매하게 끝난 전쟁은 이렘나 철랑대의 군사적인 위기를 가속화시켰다. 특히나, 자소크 철학단과의 접경은 이렘나 사회의 위협이 되었으며, 이것 때문에 이렘나 철랑대는 아마자쿠라 점령지를 포기할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이렘나 철랑대는 결국 북부와 중부 클랜들에게 통치권을 위임하는 형식의 간접적인 군정청을 운영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중부의 사사키 클랜에게 통치권을 넘겨준 채 아다키 집정구역(이렘나어: î'Adaky)이 설립된다.
아마자쿠라 내전의 실패로, 554대 철랑대장 r'Acheshiyn k'reytzevahar는 이카림 종단 출신의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
하얀늑대단의 게릴라전
평균 신장 100cm의 자수르만인은 하수도와 땅굴 등을 이용하여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들은 사흐러이스탄 부족연맹으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았는데, 시체에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등의 전술을 펼쳤다. 이들은 다른 세력보다 텐메이 공화국 세력과 아마자쿠라군을 특히 집요하게 공격하였는데, 아마자쿠라를 도우러 온 이렘나 철랑대와도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빼았았던 텐메이인에 대한 보복을 하였는데, 민간인 또한 그 대상이었다. 소수민족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을 학살하는 일이 있었고, 민간인 거주지역에 폭탄을 이용한 공격 또한 자행하였다.
각주
- ↑ 2024년 12월 27일 09시 53분 46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 ↑ 라헤신 크레이체바하르
- ↑ 아르세른의 방벽, 녹슨 산맥
- ↑ 북부 군사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 ↑ 마리네카 플라피, 엘레르디계 이렘나인
- ↑ 전쟁으로 죽은 아마자쿠라인들과 아투제르인들의 시체를 조종하여, 시내와 거리에서 아투제르인에 의한 대학살극이 일어난 것처럼 위장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