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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8년, 랑서국 전역에 강한 지진이 일었다.
5628년, 랑서국 전역에 강한 지진이 일었다.
{{본문|아코메촌 지진}}
{{본문|아코메촌 지진}}
지진으로 인해 랑서의 사키유, 요츠나 일대에 궤멸적 피해가 일었고, 이는 곧 [[요츠카미]]에 대한 불신, 즉 중앙집권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봉기를 시전한 단체는 아이마토의 빈탄(民堂)이었다. 빈탄은 농민층과 무신층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단체로서, 아이마토현의 군부를 점령하여 독립하였다.(亜也馬洞縣軍部急襲爭事) 설상가상으로 당시 요츠카미였던 츠라가 에이지가 급사하고 급기야 후대 요츠키미인 사카 에이지까지 요절하며 국치가 더욱 혼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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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위기감을 느낀 요츠카미 왕가는 이토지라의 성문을 닫고 철저한 자위에 들어선다.
또한 요츠나에 한정하여 치안체계가 작동하였고, 노출되면 위험한 요츠카미 대신 군대와 행정을 이끌 정부가 탄생했다. 이를 위정당(爲政堂)이라 하며,


===츠라가 시대 - 테루 시대 (위치기)===
===츠라가 시대 - 테루 시대 (위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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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지 시대(개항기)===
===세이지 시대(개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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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지 시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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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군기(요츠카미키)==


===세이지 시대 이후===


==도보게==
==도보게==

2025년 2월 21일 (금) 01:28 판


개요

랑서국 랑서국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제5천년기 이전

5천년기 이전의 랑서국은 아직 국외에 밝혀지지 않은 소문명이었다.[1] 당시의 시대를 고랑기(古狼紀)라고 한다. 고랑 문명에서는 독자적인 상형문자를 사용했으나, 아직 해독중이다.[2]

유물의 출토로 보아, 4천년기의 극후반에 요츠카미의 집권이 시작되었을것으로 추측한다.

제 5천년기

한자가 전래된 이후는 통치하던 요츠키미의 이름을 따 '~~시대'로써 분류한다.

쿠이 시대 ~ 하리 시대

5117년경, 랑의 항해선이 루시코와에 도착하는 일이 벌어진다. 당시 랑서국의 기술력은 다른 국가의 고대시대에 맞먹었고, 항해기술이 생기면서 대륙에 도착하게 된다.[3]

아직 세계에 고대 문명이 있었던것을 보고 단기적으로 사트에 큰 파장이 일었었다.

이후 루시코와신세이 왕국 신성문자를 전수받았고, 문자에 큰 과도기가 있었다.

토우도츠 시대

83년간의 긴 재위기간동안 안정된 국정이 있었다.

세이텐교의 도서 중 하나인 세한이 집필되었다.

토우도츠 시대 말기에는 랑서국의 통치 방식을 연방제에서 중앙집권체제로 바꾸게 되었다. 이전에는 왕권이 약해서 지방세력의 견제가 어려웠지만, 왕권이 안정화되고, 또한 세이텐교가 퍼지면서 요츠키미의 신격화가 이루어졌기에, 자연스레 집권체제도 변경되었다.

미나이 시대 ~ 에토키 시대

토우도츠 에이지의 긴 재위가 끝나고, 어린 임금인 미나이 에이지가 집권하면서 왕권이 불안정해졌다.
차왕과 소장의 권력다툼이 있었고, 분파간의 붕당이 일기도 하였다.

10년간의 짧은 시대이지만, 세군이 무려 5회[4]나 바뀌었고, 그중에 오우도 에이지는 독살당하는 등 여러 사건이 있었다.

츠코우에 시대

츠코우에 에이지가 장기 군림을 이어가면서 [5] 비교적 안정된 랑서국이 있었다.

츠코우에 시대의 초기에는 세이텐교의 도서 중 하나인 요고토가 집필되었다.

이 당시에는 이전의 랑 문화에 서레니스카 문화와 아르테니스카 문화가 뒤얽혀 과도기가 지속되고 있었다.

언어와 문자는 차츰 안정되었고, 구개음화가 확실히 자리잡았다. 아직 랑어의 표준 발음은 츠코우에 시대를 기반으로 한다.

사키가모 시대 ~ 아레아미 시대

세츠모와 구어가 융합되면서 음독 지명이나 음독 이름이 다량 생겨나게 되었다. 11대 세군 이름인 사이(𠱻) 역시 음독이다.

츠키 시대

5500년경, 랑서국이 정부를 공식적으로 수립하며 외교소를 창설하고 아트레니스카의 한 국가로써 외교에 참여하면서 국가로서의 추구를 하게 된다. 이후 랑서국은 국가로서 기틀을 마련하였고, 율법인 코쿠토호을 반포하였다.

또한 학자 야마나에 히츠나에(山名羏, 5483~5535)에 의해 랑어의 구어체 표기가 정립되었으며, 또한 교육기관인 교관을 대대적으로 창설하여 교육시설에 개혁이 생겼다.

또한 전국을 5도로 나눈 토우도츠 에이지에 이어, 87개의 촌으로 다시 나누고,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국가 제정을 확보하였다.

5542년, 급진적인 개혁에 반해 쇄국을 주장하는 자립론(自立論, 지리츠론) 분파를 대거 숙청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트.svg 자세한 내용은 제 1·2차 자론숙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츠코우에 시대와 맞먹는 97년의 초장기 집권을 통하여 랑서에서 두번 다시 없을 전성기가 발하였다.

츠키 시대 ~ 츠라가 시대

긴 재위 이후, 츠라유큐 에이지가 즉위하면서 자립론이 다시 대두되었다. 츠라유큐 에이지는 츠키와 달리 자립론을 받아들였고, 신세이 왕국 신세이 왕국루시코와 루시코와와의 무역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이로 인해 국고의 적지 않은 부분을 자급자족하지 못했던 랑서국은 불과 4년만에 기근이 들었다. 이후에 다시 무역을 이어갔으나 츠라유쿠는 2년만에 죽고, 츠라가 시대가 되어서야 겨우 안정되었으니, 이 때는 5590년이었다.

아코메촌 지진

5628년, 랑서국 전역에 강한 지진이 일었다.

사트.svg 자세한 내용은 아코메촌 지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지진으로 인해 랑서의 사키유, 요츠나 일대에 궤멸적 피해가 일었고, 이는 곧 요츠카미에 대한 불신, 즉 중앙집권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봉기를 시전한 단체는 아이마토의 빈탄(民堂)이었다. 빈탄은 농민층과 무신층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단체로서, 아이마토현의 군부를 점령하여 독립하였다.(亜也馬洞縣軍部急襲爭事) 설상가상으로 당시 요츠카미였던 츠라가 에이지가 급사하고 급기야 후대 요츠키미인 사카 에이지까지 요절하며 국치가 더욱 혼란해졌다.

...

이후 위기감을 느낀 요츠카미 왕가는 이토지라의 성문을 닫고 철저한 자위에 들어선다. 또한 요츠나에 한정하여 치안체계가 작동하였고, 노출되면 위험한 요츠카미 대신 군대와 행정을 이끌 정부가 탄생했다. 이를 위정당(爲政堂)이라 하며,

츠라가 시대 - 테루 시대 (위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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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지 시대(개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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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지 시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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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군기(요츠카미키)

도보게

  1. 랑서국이 있는 섬은 무인도로 알려져있었다.
  2. 그나마 밝혀진 문자로는 寸/huas/(별), 厶/pisi/(사람) 등이 있다.
  3. 이전에 랑서가 타국에게 알려지지 않았던건, 단지 랑서가 무인도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개항 이전의 랑서는 아직 전기 등의 다른 기술이 보급되지 않아 위성사진으로 문명을 포착하기 어려웠다.
  4. 미나이 - 코츠사 - 오우도 - 코하라 - 에토키
  5. 무려 113년간의 긴 군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