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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big>우리 민족의 영토를 다시 되찾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더 이상 자수르만의 암흑기는 없다. <br>어느 대가를 치르든 우리 선조의 땅을 되찾을 것이다!</big>|자수르만인의 분리주의 집회에서 하얀늑대단의 수장 [[어쉬파즈 셰아라프]]가}} | {{인용문|<big>우리 민족의 영토를 다시 되찾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더 이상 자수르만의 암흑기는 없다. <br>어느 대가를 치르든 우리 선조의 땅을 되찾을 것이다!</big>|자수르만인의 분리주의 집회에서 하얀늑대단의 수장 [[어쉬파즈 셰아라프]]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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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자쿠라 내에서 일어난 정치적 공백상황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아마야스 주 정부는 즉각적으로 행동하였다. [[자소크]] 정부측의 확장 반대 의견까지 무시하고 아마자쿠라 영토 내로 황색 깃발을 걸던 아마야스 주 정부는 주변국들, 특히 [[이렘나]]의 반 자소크 감정을 건들여 이렘나까지 개입을 하게 만들었다. | 아마자쿠라 내에서 일어난 정치적 공백상황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아마야스 주 정부는 즉각적으로 행동하였다. [[자소크]] 정부측의 확장 반대 의견까지 무시하고 아마자쿠라 영토 내로 황색 깃발을 걸던 아마야스 주 정부는 주변국들, 특히 [[이렘나]]의 반 자소크 감정을 건들여 이렘나까지 개입을 하게 만들었다. | ||
다수의 거대세력이 뒤엉켜 큰 혼란이 빚어진 텐메이 반도에 평화유지 명목으로 [[밀리토호스 타코뤼 왕국]]까지 개입을 하며 텐메이인들의 독자적인 국가라는 공화주의자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다수의 거대세력이 뒤엉켜 큰 혼란이 빚어진 텐메이 반도에 평화유지 명목으로 [[밀리토호스 타코뤼 왕국]]까지 개입을 하며 텐메이인들의 독자적인 국가라는 공화주의자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2022년 6월 16일 (목) 16:45 판
아마자쿠라 · 역사 · 교육 |
개요
4650년 초부터 진행된 아마자쿠라 내에서의 구조적 문제점으로 쌓여온 불만과 이것이 폭발하면서 아마자쿠라 내에 큰 변화점을 가져온 일련의 사건과 그 경과에 관해서 작성하는 문서이다.
명칭
해당 사건을 텐메이 공화국과 이를 지지했던 밀리토호스 타코뤼, 그리고 사건의 시초가 됐던 자수르만 측에서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는 사건이 되었다 하여 "아마자쿠라 혁명"으로 호칭한다. 반면에 기존 아마자쿠라 내의 무사 세력이 기반이 되었던 아다키측과 이렘나측은 이 사건을 "4646년의 반란"이라 부른다. 하지만 자소크와 제3국들은 이 사건을 중립적인 측면에서 "아마자쿠라 내전"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
배경
아마자쿠라 황실 폭탄 테러 사건
“ 천하의 광대이자, 자신이 하늘의 아들이라 믿는 미친 개여! 자수르만의 분노를 받아라!
” — 당시 폭탄을 던진 자수르만계 분리주의자가
4646년 아마자쿠라의 황실 행사에서 자수르만계 분리주의자가 사제폭탄을 던져 황실 구성원 대부분이 몰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자수르만 분리주의 단체인 하얀늑대단 소속이었고, 폭탄을 던진 뒤 주변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칼을 휘두르다가 경호원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아마자쿠라 정부는 큰 혼란에 빠졌고 당시 아마자쿠라 내에 암암리에 존재하던 자유주의 파벌, 공화주의 파벌과 분리주의 파벌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아마자쿠라는 해체 수순을 밟기 시작한다.
텐메이 공화국 건국 선언
“ 오늘 우리는 지독했던 옛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려고 합니다. 검열도 다이묘들도 그 무엇보다 황실도 이제 없습니다. 아마자쿠라, 아니 텐메이인들의 이 땅은 우리의 것입니다! 텐메이인들이여! 잃을 것은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모든것이니! 새 지평을 열어나가자!
” — 텐메이 공화국 건국 선언 연설에서
황실이 흔들리자 가장 먼저 환호한 것은 공화주의자들이였다. 텐메이 민주당을 필두로 지하에서 활동해오던 여러 공화주의 세력들은 아마자쿠라 반도가 찢어지는 것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자수르만계 테러범의 사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였지만 이 상황을 기회로 삼아 새로운 나라를 새우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당시 건국 선언에는 수많은 텐메이인들이 북새통처럼 모여 새로운 국가에 대한 텐메이인들의 열정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이러한 새 나라를 향한 열망은 분명히 더 좋은 아마자쿠라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많은 텐메이인들은 생각했었다.
내전의 시작
“ 우리 아마야스 주 정부는 공식적으로 구 아마자쿠라 내부로 영토를 확장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 — 자소크 철학단 아마야스 주 정부의 공식 발표에서
“ 우리 민족의 영토를 다시 되찾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더 이상 자수르만의 암흑기는 없다.
어느 대가를 치르든 우리 선조의 땅을 되찾을 것이다!” — 자수르만인의 분리주의 집회에서 하얀늑대단의 수장 어쉬파즈 셰아라프가
“ 따라서, 결정하겠노라. 이렘나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여. 철각에 부르짖는 비명에 응답을 하거라. 아마자쿠라에서 활동하는 우리의 적, 자소크를 말살시켜라.
” — 554대 철랑대장 r'Acheshiyn k'reytzevahar
아마자쿠라 내에서 일어난 정치적 공백상황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아마야스 주 정부는 즉각적으로 행동하였다. 자소크 정부측의 확장 반대 의견까지 무시하고 아마자쿠라 영토 내로 황색 깃발을 걸던 아마야스 주 정부는 주변국들, 특히 이렘나의 반 자소크 감정을 건들여 이렘나까지 개입을 하게 만들었다. 다수의 거대세력이 뒤엉켜 큰 혼란이 빚어진 텐메이 반도에 평화유지 명목으로 밀리토호스 타코뤼 왕국까지 개입을 하며 텐메이인들의 독자적인 국가라는 공화주의자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렘나 철랑대의 보호 전쟁
4647년 1월, 셰헤카사 제도의 텐메이 교단이 아마자쿠라의 텐메이 교단으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았다. 아마자쿠라 및 북부의 교역로가 주 수입이었던 셰헤카사 제도의 기사단은 셀니키히의 철각으로 아마자쿠라의 보호에 대한 요청을 하였고, 554대 철랑대장 r'Acheshiyn k'reytzevahar[3]가 이것을 수용하여 안건에 대한 철각 회의가 열렸다.
이렘나 철랑대 전체 외부 교류의 20%를 맡고 있는 아마자쿠라의 붕괴는 이렘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며, 특히나 이렘나의 동부지역[4]의 마법기사들은 외부 마법 분석의 차질을 내세워 아마자쿠라 북부의 개입을 결정하였다.
무엇보다, 자소크 철학단이 최근 아야마스를 개척한 것을 북메디아 지역에 대한 패권 확장으로 인식했던 이렘나는 자소크 철학단 소속이였던 아야마스의 확장을 이렘나에 대한 적대적 행위로 인식했었고, 비록 이는 자소크 중앙정부의 의사와는 관련없는 지방정부의 독단적인 행위였지만 이에 큰 위협을 받은 이렘나는 이를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아마자쿠라 북부 해안에 강습해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확전
사사키 전쟁
후유가 신궁의 관리인이자 아마자쿠라 북부 클랜이었던 미츠마에 클랜[5]은 이렘나의 개입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늘리고자, 이렘나의 개입 직전에 아마자쿠라 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철각의 수뇌부는 이 움직임을 파악하고 미츠마에 클랜과 군사 협정을 제안하였고, 이렘나와 미츠마에 클랜의 군사적인 제휴를 통해 아마자쿠라의 본국과의 보호 및 복속 전쟁을 벌인다.
반면, 미츠마에 클랜의 남부에는 사사키 클랜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미츠마에 클랜의 준동을 경계하여 북부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행하였다. 이렘나의 본대가 도착하지 않은 4647년 여름에는 이들의 공세로 인해 후유가 지역까지 물러났으나, 이렘나의 본대 개입으로 인하여 전쟁은 사사키 지역 전체에 대한 산발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이것이 사사키 전쟁이다.
창백한 낙엽
사사키 전쟁이 수렁으로 빠지고, 동부에서 아마자쿠라인들이 이렘나와 관계 없는정권을 형성한다는 소식을 들은 철각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철각은 빠른 전쟁을 위해 틸루크레아로 인한 기류 불균형 전술 사용과 금속 독 사용을 허가했으며, 사사키에서의 저항 세력에 대한 무차별 제압을 명령하였다.
“ "눈에 보이는 것은 곧 필요없는 것. 철각에 충성하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 — Marineka Flapi[6]
전쟁으로 인한 부수적인 피해에 대한 책임은 사사키 지역에 잔학한 피해를 남겼다. 특히나, 아마자쿠라 동부와 아마자쿠라 중부를 잇는 가도 역할을 했던 사사키 지방의 남부 피해는 극심했다.
“ "4647년, 사사키의 가을은 창백히 질렸다. 단풍이 든 숲길 사이로는 금속 독에 오염되어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못한 몸뚱아리가 굴러다녔다. 이렘나의 검은 깃발과 미츠마에의 푸른 깃발이 잔인한 바람 속에 흩날리며, 오염된 자들의 입명을 재촉했다."
” — 사사키측의 기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키 지역은 쉽게 진압되지 못했다. 전황이 난관에 빠지던 중 사사키 클랜의 제 2 계승순위자였던 사사키 호노카[7]가 사사키 클랜의 일부를 데리고 이렘나에게 전향했고, 이로 인해 사사키측의 수뇌부가 사라져 이렘나의 승리로 끝난다.
서부 가도 전쟁
아마자쿠라의 중부를 차지한 이렘나 철랑대는 생각지 못한 위협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자수르만인들의 봉기였다. 아마자쿠라의 보호 명분을 내세운 이렘나 철랑대는 아마자쿠라의 전복을 바라는 자수르만인들을 경계하였고, 산발적인 전투가 생긴다.
사호노트의 반란과 붉은 벚의 행진
아마자쿠라의 중부지방에는 야마토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압으로 인해 도주한 아투제르인들의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교역을 통해 이렘나 철랑대의 아투제르인에 대한 처분을 들은 바가 있었기에 이렘나 철랑대의 개입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이것은 아마자쿠라 중부 지역 장악에 차질을 맺어지게 한다. 이렘나는 아마자쿠라 사회에 아투제르인에 대한 악소문을 퍼트리고, 악소문에 대한 사실을 꾸며내기 위해 나요토 사건[8]을 일으킨다. 아투제르인들은 100년동안 친우나 마찬가지였던 아마자쿠라인들에 의하여 이렘나 점령군정에 잡혀가게 된다.
“ "아투제르인들은 간교하게 짝이 없습니다. 아마자쿠라의 형제들이여. 그들은 우리 이렘나의 지방에 무단으로 진입하여 우리의 전승을 끊으려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대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 것은 차후의 악을 위한 것이니, 우리를 도우십시오. 그 반짝거리며 웃는 얼굴 뒤에는 사악한 간계가 있을 것입니다."
” — 아마자쿠라에 포고된 선언
4648년 5월, 아투제르인들은 최후의 반란인 "사호노트의 반란"을 일으킨다.
“ "우리의 오랜 친구조차 우리를 배신하고, 이젠 우리 혼자 이곳에 남겨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빛이 마저 비치는 평원에서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 — 셀레디온 사호노트
아투제르인들은 대부분의 이렘나 점령 지역에서 살해당했다. 이때, 이렘나의 기사들은 불타는 깃발에 아투제르인들을 산 채로 매단 채 행진하였고, 불에 탄 깃철과 살점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벚꽃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붉은 벚의 행진이라고 불렀다. 살아남은 아투제르인들은 전쟁 수행을 위한 생체 마력매게체로 쓰였으며, 아마자쿠라 북중부의 아투제르 커뮤니티는 이 사건으로 절멸되었다고 한다.
“ "불타는 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네.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잔인하게 배척받는 자들의 비명이. 우리는 이들의 비명에 눈을 감았고, 언젠간 그 짐을 똑같이 지고 가겠지."
” — 후유가의 어느 검객
자소크와의 충돌
북부에서 학살의 소식을 들은 자소크 철학단는 이렘나의 남부 확장을 저지하고 아야마스의 방위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이렘나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츠나리 전투
이렘나 철랑대가 아야마스 지역 근교의 츠나리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유우바 위기
이렘나 철랑대는 자소크를 밀어붙이기 위해 남진하였으나, 밀리토호스 타코뤼 왕국 세력과의 충돌이 생겼다. 이들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이렘나 철랑대는 아마자쿠라 남부 지역의 세력권을 포기한다.
동부 저항전쟁과 미츠마에 반란
이렘나 철랑대는 보호를 명분으로 내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텐메이 공화파들과 전투할 의지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과 우호적으로 지내 새로운 아마자쿠라를 건국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지방의 귀족이나 마찬가지였던 미츠마에 클랜과의 거래와, 아투제르인에 대한 좋지 못한 처우는 공화파의 심기를 건드렸다. 결국, 동부지역의 공화파들은 이렘나를 배척하게 된다.
공화파와의 불화는 이렘나 철랑대 입장에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으며, 이렘나 철랑대가 전쟁의 명분을 잃었다는 인식 확대를 가속화시켰다.
“ "나의 투박한 욕심으로 인해 이 낙원에 지옥을 불러와버렸소. 힘이건, 군림이건, 내 앞에 있는 형제들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오? 나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의 고향은 외부의 저 짐승들에게 갈갈이 찢겨나가고 있는게 지금의 참상이라오. 너무 늦었지만, 나를 용서해주시오."
” — 미츠마에 토모치요, 미츠마에 클랜 당수
미츠마에 클랜은 이렘나 철랑대의 잔학한 행위와 아마자쿠라에서의 영향력 증강을 두려워하여 4649년 1월,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동부의 텐메이 공화국이 응답하여 동부 저항전쟁으로 확전된다. 자소크와의 충돌에 힘을 쏟고 있었던 이렘나 철랑대의 상황은 불리해지기 시작한다.
미츠마에 클랜은 진압되었으나, 이 일로 이렘나 철랑대는 텐메이 공화국과의 사이가 크게 나빠졌다. 이렘나 철랑대가 점령한 북부 지방은 이렘나에게 충성한 사사키 클랜의 일파가 흡수했다.
시노바 전쟁
이렘나 철랑대와 아야마스의 자소크 세력은 남부의 시노바 지역에서 전면전을 펼친다. 시노바 전쟁에서 자소크의 승리로, 이렘나의 남진은 종료되었고, 아야마스의 위기는 일정부분 해소되었다.
종결과 아다키의 성립
이렘나 철랑대는 아마자쿠라의 보호와 안정을 내세웠으나, 타 세력의 개입과 아마자쿠라 내부의 반발로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특히나, 자수르만 계열의 반란군과 자소크 철학단, 밀리토호스 타코뤼 왕국의 세력은 이렘나의 확장을 가로막았고, 이렘나에 우호적인 아마자쿠라 집단의 유지를 바랬던 이렘나 철랑대는 목표 달성에 실패한 채 작전의 중단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점령지에서의 아투제르인에 대한 학대와 무리한 확전은 주변 세력의 반발을 세게 불러왔으며, 타 지역의 아마자쿠라인들이 이렘나 철랑대를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렘나 철랑대의 본 목적은 아마자쿠라의 부활이었으나, 애매하게 끝난 전쟁은 이렘나 철랑대의 군사적인 위기를 가속화시켰다. 특히나, 자소크 철학단과의 접경은 이렘나 사회의 위협이 되었으며, 이것 때문에 이렘나 철랑대는 아마자쿠라 점령지를 함부로 포기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렘나 철랑대는 결국 북부와 중부 클랜들에게 통치권을 위임하는 형식의 간접적인 군정청을 운영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중부의 사사키 클랜에게 통치권을 넘겨준 채 아다키 집정구역(이렘나어: î'Adaky)이 설립된다. 현재, 이렘나 철랑대는 이 지역의 포기를 상정하여, 사사키 클랜을 이렘나 본토로 피신시키고 해당 지역을 우호국에 넘기는 방안을 생각중이다.[9][10]
아마자쿠라 내전 개입의 실패로, 554대 철랑대장 r'Acheshiyn k'reytzevahar는 이키림 종단 출신의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
하얀늑대단의 게릴라전
평균 신장 100cm의 자수르만인은 하수도와 땅굴 등을 이용하여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들은 사흐러이스탄 부족연맹으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았는데, 시체에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등의 전술을 펼쳤다. 이들은 다른 세력보다 텐메이 공화국 세력과 아마자쿠라군을 특히 집요하게 공격하였는데, 아마자쿠라를 도우러 온 이렘나 철랑대와도 전투를 벌였다.
하얀늑대단의 민간인 학살
이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빼앗았던 텐메이인에 대한 보복을 하였는데, 민간인 또한 그 대상이었다. 소수민족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을 학살하는 일이 있었고, 민간인 거주지역에 폭탄을 이용한 공격 또한 자행하였다.
헤이주 공무원 학살사건
4648년 5월 1일, 하얀늑대단 단원들은 헤이주 제 1, 2, 3 동화지구를 장악하였다. 이 때, 동화지구 치안대와 구청에서 소수민족 동화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과 치안 담당 공무원 234명을 시로사쿠라 공원에 불러모아 학살한 사건이다. 이 학살에서 생존한 자는 6명 밖에 없었다.
“ "그들은 우리를 연못 안으로 밀어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1 동화지구 치안대장인 코마츠자키 주이치 씨를 공원에 있는 무대 위로 끌고 올라갔습니다. 빠르고 톤이 높은 그들의 언어로 그들은 무언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허리띠에 찬 칼집에서 초승달 같이 생긴 칼을 꺼내들었습니다. 아무말 없이 공허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코마츠자키 씨는 그렇게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무리의 자수르만인들이 총을 우리에게 겨눴습니다. 몇 사람이 연못을 빠져나와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들은 산 채로 머릿가죽이 벗겨졌습니다. 큰 소리가 나면서 총소리가 났고, 총알이 제 어깨를 스쳤습니다. 저는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죽은 척을 하였습니다."
” — 헤이주 공무원 학살사건의 생존자의 증언
도요하라 신사 학살사건
4649년 1월 13일, 헤이주 외곽에 위치한 도요하라 신사에 하얀늑대단 단원들이 들이닥쳐 신사에 있는 민간인 39명과 항복한 아마자쿠라 군인 10명을 아마자쿠라에 협조한 압제자의 추종자들이라고 지칭하며 학살한 사건이다. 단 1명이 학살에서 생존하였다.
“ "갑자기 큰 소리가 나더니 도리이 쪽에서 군인들의 비명이 들렸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저를 빠르게 새전함 속으로 숨겼습니다. 그리고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검정색 수염을 길게 기른 키 작은 자들이 어머니와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들이 난쟁이[11]들이라는 것은 금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난쟁이 억양으로 '압제자의 추종자들을 없애러 왔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러고는 군인들을 먼저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한 할머니가 자신의 손자는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호하게 '너희들은 우리가 살려달라고 할때 살려주었는가?'라고 말하며 12살짜리 손자부터 쏴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저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저는 자소크인들이 이 곳을 발견할 때까지 죽은 어머니 옆에서 계속 울었습니다.
” — 도요하라 신사 학살사건의 생존자의 증언
각주
- ↑ 2024년 12월 26일 20시 03분 36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 ↑ 라헤신 크레이체바하르
- ↑ 아르세른의 방벽, 녹슨 산맥
- ↑ 북부 군사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 ↑ 마리네카 플라피, 엘레르디계 이렘나인
- ↑ 사사키가의 장녀
- ↑ 전쟁으로 죽은 아마자쿠라인들과 아투제르인들의 시체를 조종하여, 시내와 거리에서 아투제르인에 의한 대학살극이 일어난 것처럼 위장한 사건
- ↑ 밀리토호스 타코뤼 왕국이나 앙둔 제국에게 넘기자는 발의가 가장 많았다.
- ↑ 심지어는, 적대국가인 야마토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넘기는 방안이 제기되었을 정도이다.
- ↑ こびと. 아마자쿠라에서 자수르만인을 비하하는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