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기 마 영토 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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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순기 마 영토 분쟁'''은 [[디누단마]]와 [[란카헤 연방]]의 순기 마의 주권을 두고 분쟁한 것이다.
{{사트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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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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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디두기 = sunki ma ma na u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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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퍈프소븜 = hum m gok sunk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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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 순기 마 영토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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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순기 마 영토 분쟁'''은 [[디누단마]]와 [[란카헤 연방]] 간에 벌어진 순기 마의 영유권 분쟁이다.


== 전개 ==
== 전개 ==
[[란카헤 연방]]이 [[디누단마]]가 4708년 점령한 [[디누단마/지리#대교 3|순기 마]]의 주권을 [[란카헤 연방/역사|역사적 근거]]에 의거하여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했지만, 이미 점령한지 100년이 넘은 영토를 [[디누단마]]에서는 반환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로인해 [[란카헤 연방/역사/현대#49세기|제 1차 대 디누단마 순기 마 영토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란카헤 연방]]이 [[디누단마]]가 4708년 점령한 [[디누단마/지리#대교 3|순기 마]]의 영유권을 [[란카헤 연방/역사|윤게 문화권]]을 근거로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발생한 일련의 영토 분쟁. 란카헤 연방의 영토 반환 요구에 대해 이미 점령한지 100년이 넘은 영토를 [[디누단마]]에서는 반환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로 인해 제1 차 순기 마 영토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4912년 5월 11일에 제2 차 순기 마 영토 분쟁이 일어났고, 4년 뒤인 4916년 6월 7일에 '''순기 마 영유권에 대한 조약'''을 체결하며 분쟁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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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4912년 5월 11일에 [[란카헤 연방/역사#50세기|제2차 對 디누단마 순기 마 영토 분쟁]]이 일어났고, 4년 뒤인 4916년 6월 7일에 '''순기 마 영토 조약'''을 체결하며 분쟁을 끝냈다.
== 제1차 분쟁 ==
4812년 6월 22일, 디누단마 지청은 순기 마의 항구 건설을 위해 건축 자재를 순기 마로 옮기기 시작했다. 22일 오후에 소 킨미 란시케 섬의 어부들은 어업 중 순기 마에 못보던 선박들이 등장한 것을 발견하고 란카헤 연방의 연방경찰청 수권경비대에 신고했다. 7월 3일까지 경비대 측은 타국 선박임을 확인하였으나 디누단마 소속임은 알지 못했고, 급히 보고를 올렸다. 4일 란카헤 외무부에서 디누단마 선박임을 확인하였고 디누단마 외청에 항의하였으며 7월 5일부터는 연방경찰청이 해당 선박들에 퇴거 명령을 시작했다. 디누단마 지청에서는 7월 5일 퇴거 명령을 듣고 6일에 순기 마 지역의 화물선들로부터 상황을 파악했다. 디누단마 국정청에서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기로 결정했으며, 란카헤 측은 응수가 없자 7월 8일에 국가안보국 회의를 소집했다. 이후 란카헤 방위사령국에서 군용기를 파견해 위협을 하기로 결정되어, 9일에 무력 시위가 시작되었다. 7월 10일에는 디누단마 국정청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되어 무력 시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였다. 7월 11일 디누단마 군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란카헤 군용기들을 쫓아내기로 결정됨에 따라 대한 위협 사격을 가했고, 이후 실제 사격으로 군용기 한 대가 추락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란카헤 연방의 폭발물 관련 기술력이 부족했기에 제대로 된 대응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군용기들은 성과 없이 돌아왔으며 디누단마에서는 효과적인 격퇴를 보고했다.
 
이후 디누단마에서는 순기 마에 항구 건설을 완료하였고 군사적인 경비를 대폭 강화했으며, 란카헤 연방에서는 10대 연방회의가 총사퇴하는 등 정치적 혼란기가 찾아왔다.
 
== 제2차 분쟁 ==
4912년, 1차 분쟁 100주년을 맞아 순기 마 섬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고조되었다. 당시 디누단마 국정청은 온건파가, 란카헤의 19대 연방회의는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었다. 5월 3일부터 순기 마 섬에 디누단마의 핵융합 발전소 건설을 위한 화물선들이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곧바로 란카헤 정부는 대응에 들어갔다. 5월 11일에 만반의 준비를 갖춘 란카헤 군용기들은 폭발물을 떨어뜨리며 디누단마 선단과 순기 마에 대한 폭격을 감행했으며 디누단마 군의 응사로 여러 대가 추락하기도 했다. 디누단마 국정청에서는 핵융합 기술을 뺏길 수는 없었기에 선단 이동을 즉시 중지시켰으며, 5월 13일 란카헤 국방부는 효과적인 '격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5월 17일 디누단마 군함들이 킨미 란시케로 와서 포격을 가해 피해가 발생하자 란카헤 정부는 군용기를 디누단마 본토로 보내기로 계획을 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5월 19일 디누단마 외청은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서 회담을 갖자고 제안했고, 포격으로 큰 피해를 본 란카헤 측은 6월 3일 이에 화답하여 회담이 시작되었다.
 
4년에 걸친 회담 끝에 양측은 조약을 체결하였고, 순기 마와 주변 지역의 평화가 돌아올 수 있었다.


== 순기 마 영토 조약 ==
== 순기 마 영유권에 대한 조약 ==
{{인용문|1. [[란카헤 연방]] 과 [[이룰 연방]]의 사이, [[디누단마]]의 북쪽에 위치한 섬 (이하 순기 마)를 [[디누단마]]의 영토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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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순기 마의 원주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순기 마의 원주민중 원하는 사람은 [[디누단마]]와 [[란카헤 연방]]의 이중국적인으로 한다.
2. 순기 마의 원주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순기 마의 원주민 중 원하는 사람은 [[디누단마]]와 [[란카헤 연방]]의 이중국적인으로 한다.


3. 순기 마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아니한다.
3. 순기 마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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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기 마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에 관하여 [[디누단마]]가 사법권을 가진다.
4. 순기 마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에 관하여 [[디누단마]]가 사법권을 가진다.


4916년 6월 7일 [[디누단마]][[란카헤 연방]]위의 합의안을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4916년 6월 7일 [[디누단마]]의 정부와 [[란카헤 연방]]의 정부는 위의 조항을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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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3일 (일) 10:4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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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두기 / 퍈프소븜 / 특산품
명칭
디누단마
무디두기
sunki ma ma na utan
디누단마
퍈프소븜
xum m gok sunkima
대한민국
한국어
순기 마 영토 분쟁
안드로
안드로어
tnsrl ak dudxh qnswod
메다
메다어
nbskd if jea'v ;bslra

개요

순기 마 영토 분쟁디누단마란카헤 연방 간에 벌어진 순기 마의 영유권 분쟁이다.

전개

란카헤 연방디누단마가 4708년 점령한 순기 마의 영유권을 윤게 문화권을 근거로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발생한 일련의 영토 분쟁. 란카헤 연방의 영토 반환 요구에 대해 이미 점령한지 100년이 넘은 영토를 디누단마에서는 반환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로 인해 제1 차 순기 마 영토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4912년 5월 11일에 제2 차 순기 마 영토 분쟁이 일어났고, 4년 뒤인 4916년 6월 7일에 순기 마 영유권에 대한 조약을 체결하며 분쟁을 끝냈다.

제1차 분쟁

4812년 6월 22일, 디누단마 지청은 순기 마의 항구 건설을 위해 건축 자재를 순기 마로 옮기기 시작했다. 22일 오후에 소 킨미 란시케 섬의 어부들은 어업 중 순기 마에 못보던 선박들이 등장한 것을 발견하고 란카헤 연방의 연방경찰청 수권경비대에 신고했다. 7월 3일까지 경비대 측은 타국 선박임을 확인하였으나 디누단마 소속임은 알지 못했고, 급히 보고를 올렸다. 4일 란카헤 외무부에서 디누단마 선박임을 확인하였고 디누단마 외청에 항의하였으며 7월 5일부터는 연방경찰청이 해당 선박들에 퇴거 명령을 시작했다. 디누단마 지청에서는 7월 5일 퇴거 명령을 듣고 6일에 순기 마 지역의 화물선들로부터 상황을 파악했다. 디누단마 국정청에서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기로 결정했으며, 란카헤 측은 응수가 없자 7월 8일에 국가안보국 회의를 소집했다. 이후 란카헤 방위사령국에서 군용기를 파견해 위협을 하기로 결정되어, 9일에 무력 시위가 시작되었다. 7월 10일에는 디누단마 국정청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되어 무력 시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였다. 7월 11일 디누단마 군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란카헤 군용기들을 쫓아내기로 결정됨에 따라 대한 위협 사격을 가했고, 이후 실제 사격으로 군용기 한 대가 추락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란카헤 연방의 폭발물 관련 기술력이 부족했기에 제대로 된 대응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군용기들은 성과 없이 돌아왔으며 디누단마에서는 효과적인 격퇴를 보고했다.

이후 디누단마에서는 순기 마에 항구 건설을 완료하였고 군사적인 경비를 대폭 강화했으며, 란카헤 연방에서는 10대 연방회의가 총사퇴하는 등 정치적 혼란기가 찾아왔다.

제2차 분쟁

4912년, 1차 분쟁 100주년을 맞아 순기 마 섬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고조되었다. 당시 디누단마 국정청은 온건파가, 란카헤의 19대 연방회의는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었다. 5월 3일부터 순기 마 섬에 디누단마의 핵융합 발전소 건설을 위한 화물선들이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곧바로 란카헤 정부는 대응에 들어갔다. 5월 11일에 만반의 준비를 갖춘 란카헤 군용기들은 폭발물을 떨어뜨리며 디누단마 선단과 순기 마에 대한 폭격을 감행했으며 디누단마 군의 응사로 여러 대가 추락하기도 했다. 디누단마 국정청에서는 핵융합 기술을 뺏길 수는 없었기에 선단 이동을 즉시 중지시켰으며, 5월 13일 란카헤 국방부는 효과적인 '격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5월 17일 디누단마 군함들이 킨미 란시케로 와서 포격을 가해 피해가 발생하자 란카헤 정부는 군용기를 디누단마 본토로 보내기로 계획을 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5월 19일 디누단마 외청은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서 회담을 갖자고 제안했고, 포격으로 큰 피해를 본 란카헤 측은 6월 3일 이에 화답하여 회담이 시작되었다.

4년에 걸친 회담 끝에 양측은 조약을 체결하였고, 순기 마와 주변 지역의 평화가 돌아올 수 있었다.

순기 마 영유권에 대한 조약

1. 란카헤 연방이룰 연방의 사이, 디누단마의 북쪽에 위치한 섬 (이하 순기 마)를 디누단마의 영토로 둔다.

2. 순기 마의 원주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순기 마의 원주민 중 원하는 사람은 디누단마란카헤 연방의 이중국적인으로 한다.

3. 순기 마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아니한다.

4. 순기 마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에 관하여 디누단마가 사법권을 가진다.

4916년 6월 7일 디누단마의 정부와 란카헤 연방의 정부는 위의 조항을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1. 2024년 7월 1일 07시 25분 47초 기준. 미디어위키 표현식의 한계에 의해서 이 값은 정확하게 나타나기 힘들다.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사트/표준#Python 구현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디스코드 서버에는 차단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