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을 실행할 권한이 없습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분류:랑]] ==개요== {{국가|랑서국}}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제5천년기 이전== 5천년기 이전의 랑서국은 아직 국외에 밝혀지지 않은 소문명이었다.<ref>랑서국이 있는 섬은 무인도로 알려져있었다.</ref> 당시의 시대를 고랑기(古狼紀)라고 한다. 고랑 문명에서는 독자적인 상형문자를 사용했으나, 아직 해독중이다.<ref>그나마 밝혀진 문자로는 寸/huas/(별), 厶/pisi/(사람) 등이 있다.</ref> 유물의 출토로 보아, 4천년기의 극후반에 [[요츠카미]]의 집권이 시작되었을것으로 추측한다. ==제 5천년기== 한자가 전래된 이후는 통치하던 [[요츠키미]]의 이름을 따 '~~시대'로써 분류한다. ===쿠이 시대 ~ 하리 시대=== 5117년경, [[하츠나에]] 주도의 랑의 항해선이 [[루시코와]]에 도착하는 일이 벌어진다. 당시 랑서국의 기술력은 다른 국가의 고대시대에 맞먹었고, 항해기술이 생기면서 대륙에 도착하게 된다.<ref>이전에 랑서가 타국에게 알려지지 않았던건, 단지 랑서가 무인도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개항 이전의 랑서는 아직 전기 등의 다른 기술이 보급되지 않아 위성사진으로 문명을 포착하기 어려웠다.</ref> 아직 세계에 고대 문명이 있었던것을 보고 단기적으로 [[사트]]에 큰 파장이 일었었다. 이후 [[루시코와]]와[[신세이 왕국]] [[신성문자]]를 전수받았고, 문자에 큰 과도기가 있었다. 하리 시대 초기에, 일부 국민에게 성이 부여되었다. ===토우도츠 시대=== 83년간의 긴 재위기간동안 안정된 국정이 있었다. [[세이텐교]]의 도서 중 하나인 [[세이텐교|세한]]이 집필되었다. 토우도츠 시대 말기에는 [[랑서국]]의 통치 방식을 연방제에서 중앙집권체제로 바꾸게 되었다. 이전에는 왕권이 약해서 지방세력의 견제가 어려웠지만, 왕권이 안정화되고, 또한 [[세이텐교]]가 퍼지면서 [[요츠키미]]의 신격화가 이루어졌기에, 자연스레 집권체제도 변경되었다. 하리시대부터 이어진 성씨보급이 안정화되어서, 토우도츠 말기 즈음 부터는 평민들 중에서도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 당시 랑서의 인구수는 50만 명 가량이다. ===미나이 시대 ~ 에토키 시대=== 토우도츠 에이지의 긴 재위가 끝나고, 어린 임금인 미나이 에이지가 집권하면서 왕권이 불안정해졌다.<br> 차왕과 소장의 권력다툼이 있었고, 분파간의 붕당이 일기도 하였다.<br> 10년간의 짧은 시대이지만, 세군이 무려 5회<ref>미나이 - 코츠사 - 오우도 - 코하라 - 에토키</ref>나 바뀌었고, 그중에 오우도 에이지는 독살당하는 등 여러 사건이 있었다. ===츠코우에 시대=== 츠코우에 에이지가 장기 군림을 이어가면서 <ref>무려 '''113년'''간의 긴 군림이 있었다..</ref> 비교적 안정된 랑서국이 있었다. 츠코우에 시대의 초기에는 [[세이텐교]]의 도서 중 하나인 [[세이텐교|요고토]]가 집필되었다. 이 당시에는 이전의 랑 문화에 서레니스카 문화와 아르테니스카 문화가 뒤얽혀 과도기가 지속되고 있었다. 언어와 문자는 차츰 안정되었고, 약하던 구개음화가 확실히 자리잡았다.<ref>음도설에 기반하면 구개음화가 발현된 상태의 음운이 더욱 안정적인 경향을 보인다. ti, tu에서 구개음화가 일어나는 것을 음도구개음화라 부르는데, [[랑어]]는 사트의 음도어 중 마지막으로 구개음화가 일어난 언어이다.</ref> [[랑어]]의 표준 발음은 츠코우에 시대의 이토지라 방언을 기반으로 한다. 당시 랑서의 인구 수는 약 100만명 가량이다. ===사키가모 시대 ~ 아레아미 시대=== 세츠모와 구어가 융합되면서 음독 지명이나 음독 이름이 다량 생겨나게 되었다. 11대 세군 이름인 사이(𠱻) 역시 음독이다. ===츠키 시대=== 5500년경, 랑서국이 정부를 공식적으로 수립하며 외교소를 창설하고 [[아트레니스카]]의 한 국가로써 외교에 참여하면서 국가로서의 추구를 하게 된다. 이후 랑서국은 국가로서 기틀을 마련하였고, 율법인 [[코쿠토호]]을 반포하였다. 또한 학자 야마나에 히츠나에(山名羏, 5483~5535)에 의해 [[랑어]]의 구어체 표기가 정립되었으며, 또한 교육기관인 [[교관]]을 대대적으로 창설하여 교육시설에 개혁이 생겼다. 또한 전국을 5도로 나눈 토우도츠 에이지에 이어, 87개의 촌으로 다시 나누고,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국가 제정을 확보하였다. 5542년, 급진적인 개혁에 반해 쇄국을 주장하는 자립론(自立論, 지리츠론) 분파를 대거 숙청한 사건이 벌어졌다. {{본문|제 1·2차 자론숙청}} 츠코우에 시대와 맞먹는 97년의 초장기 집권을 통하여 랑서에서 두번 다시 없을 전성기가 발하였다. 당시 랑서의 인구수는 약 150만명 가량이다. ===츠키 시대 ~ 츠라가 시대=== 긴 재위 이후, 츠라유큐 에이지가 즉위하면서 자립론이 다시 대두되었다. 츠라유큐 에이지는 츠키와 달리 자립론을 받아들였고, {{국호|신세이 왕국}}과 {{국호|루시코와}}와의 무역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이로 인해 국고의 적지 않은 부분을 자급자족하지 못했던 랑서국은 불과 4년만에 기근이 들었다. 츠라유쿠는 2년만에 죽고, 츠라가 시대가 되어서야 겨우 안정되었으니, 이 때는 5590년이었다. ===[[아코메촌 지진]]=== 5628년, 랑서국 전역에 강한 지진이 일었다. {{본문|아코메촌 지진}} ===츠라가 시대 - 츠이구로 시대 (위치기)=== 지진으로 인해 랑서의 사키유, 요츠나 일대에 궤멸적 피해가 일었고, 이는 곧 [[요츠카미]]에 대한 불신, 즉 중앙집권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봉기를 시전한 단체는 아이마토의 빈탄(民堂<ref>아야마토 방언이다. 요츠나 방언으로는 '빈토우'다.</ref>)이었다. 빈탄은 농민층과 무신층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단체로서, 아이마토현의 군부를 점령하여 독립하였다.(亜也馬洞縣軍部急襲爭事) 설상가상으로 당시 요츠카미였던 츠라가 에이지가 급사하고 급기야 후대 요츠키미인 사카 에이지까지 요절하며 국치가 더욱 혼란해졌다. <br> 또한 빈탄의 여파로 오사호미에서도 시마모토탄(島本堂)이 생기며 더욱 국가가 분열하였다. {{인용문|士曰、亜賀即必狼之詛。哀而哀令。<br>신(하츠)이 말하건대, 이것이 필시 [[텐레이]]의 저주가 아니겠는가. 애통하고도 애통하다. |-사카 원년 교소소장 나카야 하츠나에의 어록}} 이후 위기감을 느낀 요츠카미 왕가는 이토지라의 성문을 닫고 철저한 자위에 들어선다. 17대 사카 에이지부터 24대 츠이구로 에이지 까지 한 세기 동안 8명의 요츠카미가 갈아끼워졌다. [[츠키 에이지]]가 혼자서 97년동안 재임한 것에 비하면 왕실에서도 큰 혼란이 일었던 것이다. 또한 요츠나에 한정하여 치안체계가 작동하였고, 노출되면 위험한 요츠카미 대신 군대와 행정을 이끌 정부가 탄생했다. 이를 위정당(爲政堂, 이세이토우)이라 한다.<br> 위정당은 국정을 살피고 요츠나에를 최대한 비밀리에 보위하도록 한다. 이 당시 요츠나에는 위정당과 비밀리에 만남을 갖고 국정을 결재하기만 할 뿐, 다른 정치활동, 외교, 암행이 철저히 제약되었다.<br> 위정당의 초대 차왕으로서, [[켄란 아츠즈카에]](境蘭亜続衛)가 재위한다. 코이로 8년(5641년), 빈탄이 아야마토의 네이로 시를 침략하는 일이 발생하며, 이 때 민간인이 대거 희생하였다. 또한 이 외에도 빈탄의 요츠나 약탈이 계속되었으며, 위정당은 아야마토와 인접한 요츠나의 도시(키타히로시 등)의 인구에게 강제 이주를 명령하였다. 코이로 10년(5643년), 켄란이 위정당을 위치당(爲治堂)으로 개칭한다. 또한 기존 랑의 군대를 당군(堂軍)으로 개편하고 대규모 징집을 시도하였다. {{인용문|狼行三斬認罪在生曰言、此時亜罪不卽何賀亜罪在生假宋<br>[[텐레이]]께서 삼참인죄<ref>살, 간, 위. 죽이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거짓하지 않는 것. 또한 이 죄를 범했다면 텐레이의 이름으로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ref>가 있다 하였거늘, 지금이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그다더냐!|켄란}} 이 이후로 많은 사람이 당군에 지원했다. 사실 요츠나를 지키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연이은 기근에 북부에 식량난이 있어서 군에 들어가서 배부르게 사는게 더 나은 경우도 있었다. ... 이후 랑서국 전역에서 펼쳐진 전쟁은 세이지 시대까지 이어진다. 당시 랑서의 인구수는 약 130만명 가량이다. 츠키시대에 비해 잦은 흉작과 전쟁으로 인구수가 급감하였다. ===세이지 시대(개항기)=== 전쟁이 과도하게 지속되자, 요츠나의 세력은 불리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요츠나 내 요미요리 부근에서 역시 반란군이 생겼고, 요츠나이토지라와 그 부근 지역에는 다시 한 번 비상이 걸린다. 이러한 파국에서 세이지 에이지는 큰 결단을 내린다. 5798년, 세이지 에이지는 암회에서 당군의 무사인 [[아오즈키 케무]]에게 밀령을 고한다. {{인용문|金賣銃買往<br>금을 내어 총을 사오거라.<br>買基戰言、北珠洋銃製而、金貧宋<br>[[메티샤 전쟁|매기전]]으로 인해, 북쪽의 [[셰스카테|주국]]는 총을 많이 만든 반면, 금이 부족할 것이다.<br>閉嶼必終時賀來太<br>섬의 무역을 닫는 일이 필시 끝날 날이 왔느니라.|세이지기 21년 2월 말일 암회에서}} 이 말과 함께 아오즈키에게 사비를 들여 금 50냥<ref>한화로 약 3억, [[자소크 테로]]로는 약 21만 테로에 달한다.</ref>을 건네준다. 아오즈키는 급히 선박 하나를 타 [[신세이]]의 해협을 거쳐<ref>신세이는 랑과의 오랜 우교국으로서, 종교와 언어에서 비슷한 면이 많다. 적은 통행금을 받고 아오즈키의 선박을 보내주었다.</ref> 셰스카테로 들어갔다. {{인용문|國賀極困洋物買爲來末太<br>국가가 심히 빈곤하여, 그대 나라의 물건을 빌리러 왔소이다.|아오즈키}} 셰스카테의 재외동포청은 이를 듣고 국방부로 이 안건을 넘겼다. 다만 [[랑인]]이 셰스카테에 온 것은 매우 드물었기에, [[랑어]]를 할 수 있는 셰스카테인도, [[셰스카테어]]를 할 수 있는 랑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나 아오즈키의 [[자소크어]] 실력 역시 형편 없던 때, 마침 국방부에 [[야마토]]인 대사인 카시와 하루쿠니(柏 春州)가 있었어서, 랑, 야마토, 셰스카테 이 셋은 [[신성문자]] 필담을 통해 소통에 성공하였다.<ref>사실 야마토의 한문과 랑의 한문 역시 완전히 들어맞는 것은 아닌데, 소통이 아예 안 될 정도는 아니다.</ref> {{인용문| Ügrataigrumíe J'atreniska roy J'ocuna natiquarop u izàd exain. <br>요츠나를 통해 아르테니스카를 견제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이로울 것입니다.|셰스카테 국방부 차관 키엘 텐 에르타}} 셰스타케는 랑서를 친주국으로 바꾸어 아트레니스카의 [[루시코와]]와 [[주아트레니스카]]로부터 [[아트레니스카]]를 견제할 목적으로 흔쾌히 무역을 채결하였다. 또한 동시에 5799년 1월 6일, [[랑]]과 [[셰스카테]]는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총 200 정의 소총과 총알 15000 발을 수입해온 아오즈키는 나가코우 항을 통해 요츠나이토지라에 도착하고, 신속히 당군에 화병기를 보급한다. 그렇게 5800년 1월 8일, 세이지는 대략 '''160년'''간 이어져온 폐서와 혼란을 깨부수고 인민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으로는 160년, 세대로는 8대, 기나긴 기간동안 대부분의 시민은 요츠카미를 볼 수 없었고, 한 평생 요츠카미를 본 랑인 역시 극소수의 노인이었다. 단지 연호가 바뀜을 통해 그 존재를 상기할 수 있었던 그런 요츠카미가 세상에 나타나서 평정하니<ref>랑서의 요츠카미는 종교와도 깊은 연관이 있어서, 폐서되었을지라도 절대왕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ref> 랑은 열기로 차올랐고, 이는 더욱 당의 지지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세이지의 지휘 하에, 요츠나 외의 지역을 침투하여 빈탄과 반란군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길고 긴 전쟁 끝에 5804년 6월 15일, 랑서는 완패에 대한 종전을 선언한다. 이로서, 세이지는 다시 세군의 치세를 되찾은 것이다. ===헤이요우 시대=== ... ===헤이요우 시대 이후(긴 밤의 시대)=== ==세군기(요츠카미키)== 왕가에 있어서 요츠카미 주위의 사관이 행정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다. 이를 세군기라고 한다. 세군기에는 보통 이런 내용이 적혀져있다. 세군과 신하의 경연,토론 내용 세군의 연설 내용 외교와 조약에 대한 내용 죄수의 재판과 형벌 기록 전국 각지의 사찰기록과 발생한 사건에 대한 내용 날씨와 일출, 일몰 시각등 천문현상에 대한 내용 세군과 왕가의 식사 내용 위치기 한정, 세군과 위치기의 밀담 내용 이런 내용을 적은 초본(初本)을 만들고, 그 기록을 모아 편집해서 중본(中本)을 만든다. 또한 중본의 어체를 정리하고 해서 또는 행서로 편찬한 것이 기(記)로, 전국토에 3권을 나누어서 보관한다. 중본과 기를 정리하는 토론을 서기론(書記論)이라고 하며, 글자 하나, 획 하나로 딴지를 거는 토론 풍경으로 인해 랑서에선 '무의미한 말싸움을 하다'라는 뜻으로 "서기론을 벌이다"라는 관용구가 쓰인다. 물론 서기론을 할 때는 영구히 보존되는 중요한 문서를 쓰는 것이기에 (심지어 세군은 종교의 최고직 역시 맡고있기에 종교와도 연관이 있는 글이다.) 오자나 비문이 있으면 안된다. 보통 서기는 [[요츠카미|토우도츠 시대]]부터 시작해서 3-5년에 한 번 씩 정리하며, 하나의 초본을 중본으로 만들 때 서기론에만 약 약 2년이 걸린다. <br> 현대의 서기는 [[요츠키미|츠코우에 시대]]의 요츠나이토지라 방언을 기반한 [[랑어|지호키]] 표기법을 사용하여 기록한다. 다만 표기가 정립되지 않은 토우도츠 시대부터 에토키 시대는 표기가 중구난방하였다. 가장 많은 기를 가지고 있는 요츠카미는 31권의 기를 가진 [[츠키 에이지|츠키]]이고, 그 두번째는 28권의 책을 가진 츠코우에이다. 츠코우에가 113년의 최장의 치세를 갖고 있는 반면, 츠키 에이지가 3.1년마다 기를 편찬한데 비해 츠코우에 에이지는 약 4년에 한 번씩 기를 편찬했기에, 더 적은 기 수를 보인다. ==도보게==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국가 (원본 보기) 틀:국기/구현 (원본 보기) 틀:국기그림 (원본 보기) 틀:국기그림/구현 (원본 보기) 틀:국호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나라자료 랑서국 (원본 보기) 틀:나라자료 루시코와 (원본 보기) 틀:나라자료 신세이 왕국 (원본 보기) 틀:본문 (원본 보기) 틀:인용문 (원본 보기) 랑/역사 문서로 돌아갑니다.